[※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양조의 가장 거룩한(?) 본질은 껍데기를 버리고 곡물이 품은 생명력의 진액만을 한 방울씩 쥐어짜 내는 일이다. 흔히 술을 빚는다고 하면 커다란 독에 쌀과 누룩, 그리고 맑은 물을 가득 부어 발효시키는 넉넉하고 풍요로운 풍경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 전통주 역사에는 이러한 양조의 기본 상식을 철저하게 파괴하며, 타협을 모르는 집요한 집념으로 완성되는 술이 있다.
우리 술 가운데 가장 지독하고 비효율적인 양조법으로 꼽히는 '동정춘'(洞庭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동정춘은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중국 송나라 시대의 대문호 소동파가 '동정춘색부'(洞庭春色賦)라는 명시를 남기며 극찬했던 '동정춘색'이라는 천하의 명주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후 조선시대 선비 사회에서도 환상의 술로 불렸다. 이름은 봄날의 호수처럼 한없이 낭만적이고 여유롭지만, 이 술이 만들어지는 실제 과정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곡물이 겪어야 하는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인내의 과정이라고 해야 옳다. 동정춘은 쌀과 누룩, 그리고 '물'이 필요하다는 양조의 절대 공식을 깨뜨리는 술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전통주가 쌀과 물을 거의 일대일 비율로 섞어 발효시키는 것과 달리,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등 고문헌에 기록된 동정춘 제조법을 보면 물을 아주 극소량만 사용하거나 아예 쓰지 않는다.
먼저 멥쌀가루를 뜨거운 물로 반죽해 가운데 구멍을 뚫은 '구멍떡'을 빚는다. 이 구멍떡을 끓는 물에 삶아낸 뒤, 떡이 머금은 최소한의 수분과 찰기만으로 누룩가루를 치대어 독에 안친다. 며칠 뒤 찹쌀로 지은 고두밥을 덧술로 넣어 다시 발효를 이어가는데, 이때도 물은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는다.
이처럼 물을 철저히 배제한 동정춘의 뻑뻑한 고체 발효 방식은 흥미롭게도 중국의 최고급 백주(白酒)를 빚는 핵심 기술인 '고태법'(固態法)과 완벽하게 결을 나란히 한다. 중국의 명주들 역시 수수 같은 곡물을 쪄낸 뒤 물을 붓지 않고 고체 상태 그대로 누룩과 버무려 발효시키며 농염하고 폭발적인 향기를 끌어낸다.
하지만 두 술의 공통점은 딱 여기까지다. 그 외의 양조 목적과 결과물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는다. 중국의 백주가 고체 발효물에 뜨거운 증기를 쐬어 향과 알코올만 기화시켜 뽑아내는 '증류주'라면, 동정춘은 삭아버린 고체 덩어리 자체를 베주머니에 넣고 짓이겨 끈적한 진액을 짜내는 '발효주'다.
곡물의 영혼을 증기로 가볍게 날려 보내느냐, 곡물의 뼈와 살을 으깨어 핏방울처럼 무겁게 쥐어짜 내느냐의 결정적인 차이다.
물이 없으니 누룩 안의 효모가 곡물을 분해하는 과정은 더디고 힘들 수밖에 없다. 효모는 수분이 턱없이 부족한 극한의 사막 같은 환경 속에서, 쌀이 품고 있는 미세한 수분만을 갉아먹으며 발효를 이어간다.
이토록 가혹한 환경에서 빚어지기에 그 결과물은 참담할 만큼 적다.
보통 쌀 10kg으로 막걸리나 약주를 빚으면 수십 리터의 술을 얻을 수 있지만, 동정춘은 쌀 한 말(약 8kg)을 통째로 털어 넣고 오랜 시간 발효를 거쳐도 완성되는 술의 양은 겨우 한두 병(1~2리터)이 찔끔 나올까 말까 한 극악의 수율을 보여준다.
경제성이나 효율성이라는 단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광기 어린 집착이다. 오죽하면 양조장 사이에서 동정춘을 일컬어 '쌀의 피눈물을 짜낸 술'이라고 부르겠는가.
양이나 수익을 목적으로 한다면 절대 빚을 수 없는, 오직 극강의 맛과 향이라는 하나의 본질을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을 희생시킨 결과물이다.
물을 철저히 배제하고 쌀의 진액만을 농축시켰기에 동정춘의 맛과 향은 폭발적인 느낌이 난다. 잔에 따르면 맑은 물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라 진득한 꿀처럼 묵직하게 떨어진다.
잔에 입술을 대기 전부터 복숭아, 포도, 참외 같은 다채로운 과실 향과 짙은 꽃향기가 공기 중으로 훅 끼쳐 오른다.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면 혀끝을 마비시킬 듯한 강렬한 단맛과 부드러운 산미가 식도를 타고 끈적하게 흘러내린다. 흔히 아는 알코올의 찌르는 맛이 아니라, 자연의 곡물이 극한의 고통 속에서 피워낸 찬란한 생명력의 맛이다. 옛사람이 '꿀보다 달다'고 묘사했던 감미가 바로 이 척박한 발효 과정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빠르고 대량으로 생산되는 현대 사회에서 동정춘을 빚는 일은 어쩌면 지독한 시대착오일지 모른다. 효율성이 최고의 미덕이 된 세상에서 쌀 한 말을 희생해 겨우 한 병의 술을 얻는 행위는 바보 같은 짓으로 치부되기에 십상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징그러운 고집을 현대에 되살려내는 여러 장인이 있다.
특히 전통 누룩 방식으로 동정춘을 빚는 '한영석의 발효연구소'에서 선보인 동정춘은 양조 철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자신의 이름을 건 자가 누룩을 직접 디뎌 술을 빚는 한영석 소장은 고문헌의 정석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동정춘을 복원해 냈다.
찹쌀과 멥쌀, 그리고 직접 띄운 누룩만을 사용해 물 없이 빚어낸 이 술은 옛사람이 찬탄했던 '꿀같이 단 술의 모범'을 현대인의 혀끝에 그대로 재현해 낸다. 특유의 끈적한 질감과 폭발적인 감미는 잘 빚은 동정춘이 지닌 본질이 무엇인지 묵직하게 증명한다.
또 '술빚는 전가네'의 '산정호수 동정춘 막걸리'는 물을 거의 쓰지 않는 뻑뻑한 발효 방식을 응용해 걸쭉한 질감과 과일 향이 터지는 단맛을 대중적으로 훌륭하게 풀어냈고, '농업회사법인(주)산수'의 '산수 동정춘' 역시 쌀의 비율을 극대화해 입안에 꽉 차는 단맛과 묵직함을 자랑한다.
한편 '국순당'은 옛 고체 발효 방식을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초고가 한정판으로 동정춘의 위용을 증명하기도 했다.
효율의 시대일수록 전통주 애호가는 가끔 이토록 비효율적이고 고집스러운 것들에 기대어 위로받는다. 쉽게 얻어지지 않는 것, 뼈를 깎는 시간과 희생을 거쳐야만 비로소 허락되는 그 농밀한 진액이야말로 우리의 건조한 일상을 적셔주는 진짜 풍류이기 때문이다.
오늘 저녁, 잔 속에 담긴 동정춘의 황금빛 진액이 유난히 무겁고 끈적하게 빛난다. 그 한 잔에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놓치고 살았던 수많은 본질과 쌀의 피눈물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칼럼니스트
<정리 :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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