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북극 전략 요충지인 그린란드 편입을 밀어붙이면서 대서양 동맹 균열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영토와 안보 문제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훨씬 더 큰 흐름이 깔려 있다. 미국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세계 질서를 운영할 수 없는 국면, 다시 말해 ‘헤게모니 이후’의 질서 속에서 동맹마저 거래의 대상으로 돌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3일 국회입법조사처가 지금 이 시점에 그린란드 보고서를 꺼내든 것도 바로 이 변화를 한국이 더 이상 관망만 해서는 안 된다는 신호로 읽힌다. 입법조사처가 내놓은 ‘현안분석’은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그린란드 편입 시도가 최근 미국과 유럽 사이 갈등을 급격히 증폭시킨 대표적 사건으로 짚었다.
미국은 북극 전략 거점 확보와 자원 개발, 미사일 방어망 구축을 내세워 덴마크령 그린란드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추진해 왔다. 그린란드는 북극 항로와 북미 대륙을 연결하는 전략 거점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감시할 수 있는 전진 기지를 세울 수 있고, 희토류와 천연가스 등 전략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북극 해빙으로 상업 항로 가치까지 커지면서 그린란드는 더 이상 불모지가 아니라 군사와 자원, 물류가 겹쳐지는 전략 자산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란드 영유권 문제를 처음 공개적으로 거론한 것은 2019년이었지만, 올해 들어 수위는 확연히 높아졌다. 지난 1월 트럼프 대통령은 필요하다면 강압적 수단도 사용할 수 있다는 취지로 언급했다. 같은 달 발표된 미국 국가방위전략(NDS)에도 현지 기지 확대 계획이 담기면서 국제사회에서는 이를 사실상 ‘그린란드 위기’ 단계로 보기 시작했다.
이후 다보스포럼(WEF)을 계기로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이 긴급 협의가 진행되면서 군사 행동 가능성과 추가 관세 조치는 일단 거둬들여졌지만, 기지 운영권과 자원 개발 이익 배분을 둘러싼 미국·덴마크·그린란드 간 협상은 계속되고 있다. 긴장은 멈춘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꿔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려면 사건이 아니라 구조를 봐야 한다. 패권이 절정에 있을 때 미국은 동맹을 공공재처럼 관리했다. 안보를 제공하고, 질서를 설계하고, 동맹을 묶어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헤게모니가 약해지는 국면에서는 방식이 달라진다. 비용을 줄이면서 통제력도 유지하고 동시에 동맹에도 대가를 요구한다. 지금의 그린란드 문제는 바로 그 장면이다.
미국은 더 이상 동맹의 신뢰를 자명한 전제로 두지 않는다. 대신 자원과 항로, 군사 거점을 직접 지배하겠다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규범의 언어보다 거래의 언어가 앞서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이 이 사안을 단순한 북극 영토 논쟁이 아니라 대서양 동맹 질서 자체에 대한 압박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덴마크는 1814년 이후 그린란드를 자국령으로 유지해 왔고, 그린란드는 1979년 자치령 지위를 얻은 뒤 2009년 자치정부를 구성하며 정치적 자율성을 넓혀 왔다. 이런 상태에서 미국이 동맹국 영토 문제를 사실상 협상 카드로 꺼낸 것은 유럽 입장에서는 안보 우산의 균열을 넘어 정치적 신뢰의 붕괴로 읽힐 가능성이 상존한다.
이 사건은 미국과 유럽 사이의 외교 마찰이 아니라, 전후 서방 질서를 떠받쳐 온 대서양 동맹 운영 원리가 바뀌고 있다는 징후에 가깝다. 실제 유럽은 전략적 자율성 확보를 내걸고 군사력 증강과 재무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동시에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전면 충돌이 아니라 ‘관리된 협력’을 모색하고, 인도와 남미 등 글로벌 사우스와의 연계를 넓히고 있다.
이것은 유럽이 미국을 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가 끝났다는 현실적 판단이다. 미국 중심 단극 체제가 흔들리고, 여러 축이 병존하는 다극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유럽은 생존 방식 자체를 다시 설정하고 있다.
그린란드가 특히 민감한 이유는 희토류 때문이다. 이 지역에는 네오디뮴과 디스프로슘 등 핵심 희토류 매장 가능성이 거론돼 왔다. 이 광물들은 전기차 모터, 풍력 발전기, 반도체 장비에 들어가는 소재다. 특히 네오디뮴 자석은 전기차 구동 모터와 첨단 반도체 장비에서 빠지기 어렵다.
지금 미국과 유럽이 중국 의존을 줄이기 위해 가장 먼저 건드리는 지점이 바로 이 희토류 공급망이다. 그린란드 개발이 현실화하면 북극 문제는 곧바로 배터리와 반도체 산업의 원재료 문제로 이어진다. 그린란드는 영토 분쟁의 현장이 아니라 첨단 산업 공급망 전쟁의 전선인 셈이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금 이 시점에 이 보고서를 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봐야 한다. 북극은 더 이상 먼 지역이 아니다. 해빙으로 항로 가치가 커지고 있다. 미·중 전략 경쟁이 공급망으로 번지고, 유럽 재무장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한국의 산업·안보·외교가 한 지점에서 동시에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조선과 해운은 북극항로와 직결되고, 배터리와 반도체는 희토류 공급망과 연결되며, 방산은 북극 군사화와 유럽 재무장의 파장을 피할 수 없다. 국회입법조사처가 그린란드를 따로 떼어 분석한 것은 이 사안을 외교 뉴스로 소비하지 말고 국가 전략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는 뜻으로 분석된다.
행정부와 입법부가 받아들여야 할 메시지도 분명해 보인다. 북극 항로 경쟁이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해운과 조선 전략을 다시 짜야 하고, 희토류를 둘러싼 공급망 재편에 대비해 배터리·반도체 원재료 조달 구조를 거시경제적 측면에서 더 촘촘히 설계해야 한다.
동시에 외교적 측면에서는 유럽 재무장과 북극 군사화 흐름 속에서 방산 수출과 안보 협력의 공간도 넓혀야 한다. 국내 예송논쟁으로 사안을 미루기에는 시급한 사안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아울러 한미동맹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가치 공유 국가들과의 다층 협력, 자원 외교, 공급망 동맹, 북극 전략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그린란드 사태는 얼음 섬 하나를 둘러싼 다툼이 아니다.
미국이 약해졌다는 뜻도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미국이 예전처럼 질서를 유지할 운신의 폭이 줄어든 자리에서 더 직접적이고 더 노골적인 방식으로 전략적 패권을 움켜쥐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유럽의 재무장, 중국과의 관리된 협력, 글로벌 사우스의 부상, 공급망 재편과 맞물리며 세계를 다극 질서 쪽으로 밀어가고 있다. 헤게모니 이후의 세계는 선언으로 오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그린란드 같은 변방에서부터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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