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한국 사회의 높은 자살률을 개인의 정신 건강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 위기의 신호로 봐야 한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불신·불안·불만이 누적된 이른바 ‘3불(不) 사회’ 환경이 자살 위험을 높이는 배경이 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은 12일 의료·심리·사회 등 각 분야 전문가 논의를 바탕으로 ‘제1차 자살예방 라운드테이블 결과 보고서’를 발간했다. 논의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국내 자살 문제를 개인의 심리적 취약성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보고 사회 구조와 정책 시스템 전반에서 접근해야 할 복합적 과제로 짚었다.
보고서 발간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가 승자독식 경쟁 구조와 양극화 심화 속에서 불신·불안·불만이 누적된 ‘3불 사회’로 진입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이들은 이러한 환경이 개인의 삶의 안정성을 약화시키고 상대적 박탈감과 좌절감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봤다.
지난 5일 발표된 ‘국민 삶의 질 2025’에 따르면 2024년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29.1명으로 전년 27.3명보다 상승해 1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40대와 50대, 30대에서 증가 폭이 두드러졌고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 역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하위권에 머문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공동체 약화와 사회적 고립도 주요 위험 요인으로 꼽았다. 특히 노년층의 경우 단순한 우울감 문제를 넘어 가족 관계 변화, 기대 붕괴, 경제적 스트레스 등이 겹친 고립 상태가 자살 위험을 높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일부에서는 이런 상황이 스트레스성 인지 저하와도 연관될 수 있다고 봤다.
정책적 한계에 대한 지적도 나왔다. 전문가들은 현재 자살 예방 정책이 단기 사업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향이 강해 지속적인 구조적 접근이 부족하다고 봤다. 또 자살 관련 데이터가 여러 부처에 분산돼 있어 종합적인 분석과 정책 연계가 쉽지 않다는 점도 문제로 꼽았다.
이들은 해결 방향으로 데이터 기반 정책 접근과 생명존중 문화 확산을 제시했다. 우선 부처별로 흩어진 공공 데이터를 연계해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정책 효과를 검증하는 사회적 실험을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기초연금 등 현금성 복지가 노인 자살률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 사례를 언급하며 효과가 입증된 정책에 자원을 집중하는 ‘에비던스 기반 정책’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교육과 사회 인식 개선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전문가들은 초·중·고교에서 정서 회복력을 기르는 행복 교육을 확대하고 자살 유족 지원과 생명존중 문화 확산을 통해 자살 예방을 사회적 운동 차원으로 넓혀야 한다고 봤다. 아울러 자살을 생각했다가 삶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경험을 분석해 회복 탄력성을 강화하는 연구도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아울러 치료 중심 접근을 넘어 지역사회 의료·상담 자원을 연결해 사회적 고립을 예방하고 지자체 자살예방 담당 인력의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전문가들은 자살 문제를 개인의 병리로만 접근하는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생명보험재단 주관 자살예방 라운드테이블 공동의장인 서울대 이재열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의 높은 자살률은 사회 시스템의 고장을 보여주는 ‘사회적 부검 리포트’와 같다”며 “자살 문제를 개인의 병리적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정책 환경을 함께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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