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성들은 한 시대를 지나며 자신의 삶으로 하나의 좌표를 남깁니다.
<마리끌레르>는 3.8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자 어른‘들을 만났습니다.
오랜 시간 자신을 단련하며 결국 하나의 세계가 된 여성들.
작곡가 진은숙
반발이 있더라도 계속해서 내 일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게 중요한 거죠.
이 세상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줄 거라는 기대를 버려야 해요.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 작품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시작하면 힘들지 않아요.
작곡가 진은숙을 설명하는 많은 문장에서 반복되는 표현은 ‘아시아 최초’다. 2024년, 그는 ‘음악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을 수상했다. 1974년 제정 이후 아시아 작곡가로서는 최초의 수상이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레너드 번스타인, 다니엘 바렌보임 등 당대 음악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이름을 올린, 현대음악 분야 최고 권위의 상이다.
한국 출신, 그것도 여성 작곡가가 독일 현대음악의 중심에서 이 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단순한 개인적 성취를 넘어 하나의 상징적 장면으로 다가왔다. 지난 수 세기 동안 베토벤도, 쇼팽도, 차이콥스키도 남성이던, 백인 남성으로 이뤄진 서양음악사. 그 견고한 계보가 오랫동안 기준이자 질서로 작동해온 세계에서 진은숙은 꾸준히 그 벽을 넘어서고자 했다. 이해되지 않는 시간, 연주되지 않는 시간, 인정받지 못하는 시간을 묵묵히 통과한 끝에 만난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 리게티의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 섰다. 이후 40여 년간 독일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현대음악 안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구축하고자 분투했다. 대표작 중 하나인 <피아노 협주곡>은 1997년 BBC 웨일스 국립 오케스트라 초연 당시까지만 해도 고도의 연주 기량을 요구한다는 이유 등으로 기피되었지만, 10여 년의 시간을 지나며 그 치밀한 구조와 밀도의 아름다움이 새롭게 조명받았다. 2007년 첫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또한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 개막작으로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극장에서 초연 당시 편견과 저항이 있었지만, 유럽과 미국 여러 도시에서 재공연되며 작품의 생명력을 입증했다. 최근작인 2025년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극장에서 초연한 오페라 <달의 이면>은 전체 스토리부터 리브레토(가사와 대사)와 음악까지 모두 직접 집필해 완성한 3시간 분량의 대작이다.
그의 음악에는 극도의 정교함과 세공이 있다. 한 음, 한 리듬, 한 호흡까지 정확히 새겨놓으려는 의지가 작품 전체에 스며있다. 긴장의 증폭을 거치며 추상적인 음들이 어느 순간 폭발하듯 펼쳐질 때,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이렇게나 힘이 없나 싶게 가볍게만 느껴진다. 그는 이 아름다움을 두고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깎아내는 고행 끝에 첫 음이 나온다고 말한다. 그에게 작곡은 흘러넘치는 영감의 산물이기보다,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유 노동에 가까운 듯 보인다. 시간은 유한한 듯 보이지만, 작품은 그 시간을 건너기도 한다. 진실로 좋은 음악은 결국 이해의 속도를 넘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는다. 진은숙은 그 진실을 믿으며 다시 빈 오선지를 마주한다. 2030년까지 모든 위촉 일정이 채워진 그를 베를린에서 만났다.
통영국제음악제가 3월 27일 개막을 앞두고 있습니다. 프로그램과 연주자 라인업 등 큰 기획은 모두 마무리가 됐을 텐데요. 올해 타이틀이 ‘Face the Depth’이지요.
이제 한국에서 클래식 음악은 매우 활성화되었고,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음에도 문득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음악 그 자체를 듣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때가 있습니다. 특정 연주자에게 관심이 집중되며 음악계가 점점 사람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데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예요. 다만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결국 그 안에 담긴 깊이를 이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우리가 그 깊이를 얼마나 자각하고 있는지, 그 지점에서 질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음악제 역시 스타 연주자들을 초청하지만,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전체 라인업과 프로그램을 통해 청중이 음악의 깊이를 얼마나 느낄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에요. 그런 고민에서 비롯된 타이틀이죠.
올해 5년째 통영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을 맡고 있습니다. 문득 지금 떠오르는 아름다운 순간이나 추억도 많을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음악제가 그렇듯 오랜 준비 끝에 음악이 무대에서 연주되고 울려 퍼지는 순간에 오는 엄청난 감동이 있죠. 그때 느끼는 전율은 말로 다하기 어려워요. 저뿐만 아니라 객석에 있는 청중에게 내 음악적 의도와 방향이 불길처럼 번져가는 것을 느낄 때 큰 보람을 느끼고요. 해마다 그런 순간들을 품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음악제 개막 시의 설렘이 더 좋은가요, 폐막할 때의 홀가분함이 더 좋은가요?
시작할 때가 더 좋죠. 끝나고 나면 너무 허전하니까. 마지막 날, 일요일 오후 폐막 연주가 끝나고 모두가 떠난 공연장에 서면 여기가 지난 열흘 동안 그 모든 드라마가 펼쳐진 공간이 맞는지 믿기 어려울 만큼 적막하거든요. 그 순간 정신적으로 좀 힘들죠.
1985년 서울대 졸업 작품인 <스펙트라(Spektra)>로 암스테르담 가우데아무스 재단 작곡상 1위 수상 후 함부르크 음대에 가게 됐죠. ‘나는 여기서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자각한 순간이 있나요?
한국을 떠나던 당시 상황은 지금과 굉장히 달랐어요. 정치적으로는 독재 정권 아래 있었고, 여성으로서 무엇인가를 해나간다는 것 자체가 지금보다도 훨씬 어려운 시기였으니까요. 현실이 너무 암울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한국에 머무르기보다는 더 큰 세상으로 나가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꿈을 안고 있었죠. 지금은 음악가가 한국에서도 충분히 자리 잡고 활동할 수 있을 만큼 한국이 세계 음악계에서 점점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40여 년 전에는 상황이 달랐죠.
특별한 각오가 필요하진 않으셨습니까?
각오 없이 살아갈 수 있던 때가 아니었죠. 모두가 가난했고, 말 그대로 배고프고 추운 시절이었으니까요. 무엇보다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이 컸어요. 음악적으로 무엇을 대단히 이루고 성취하겠다는 포부 이전에 우선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게 사는 것. 그게 당시 일생의 큰 목표였어요.
세계적인 작곡가 죄르지 리게티를 사사한 시간은 작곡가님의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시기일 것 같습니다. 한데 이 시기를 두고 ‘슬럼프’라고 표현하셨더라고요. 지금 이 순간 돌아볼 때 무엇을 남긴 시간이라고 보십니까?
리게티 선생님이 어려운 사람이라는 건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고요.(웃음) 그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힘들 수밖에 없었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다가 어린 나이에 갑자기 유럽으로 향하고,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사고방식 자체가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로 이뤄진 세상에 뚝 떨어졌잖아요. 심지어 어려운 공부를 해나가야 했으니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 놓이면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싶어요. 근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과정을 겪지 않았다면 나라는 사람이, 내 삶이 어떻게 됐을까 싶어요. 낯설고 충격적인 환경에서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던 경험이 평생을 살아가는 데 큰 공부가 됐다고 느끼죠. 물론 지금에야 드는 생각이지만요.(웃음)
왜 혹독한 환경에 놓이면 더 강해지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맞아요. 힘든 시간 속에서 오히려 생각이 많아지고, 더욱더 노력하게 되죠. 편안하게만 살아왔다면 적어도 창작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창작은 결국 스스로 겪고, 파고들고, 끝까지 헤쳐나가야 할 정신적 과정이니까요.
당시 “리게티 선생님이 나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이야기만 했다”고요.
스물네 살에 공부를 시작했고, 그분은 예순을 훌쩍 넘겨 퇴임을 앞둔 세계적인 음악가였잖아요. 유대인으로서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가족 대부분을 잃은, 정신적으로도 매우 힘든 인생을 살아온 분이었어요. 그런 분이 그 나이에 건네는 말을 스물네 살의 내가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죠. 하지만 그때 들은 말들이 당시에는 와닿지 않았어도 시간이 지나 경험을 쌓고 성숙해지면서 조금씩 이해되는 부분들이 있더라고요. 그것이 큰 도움이었죠.
젊은 시절에는 스승의 세계에 닿기 위해 혼신을 다해야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자신의 길이 시작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작곡가님에게 스승을 ‘따르는’ 일과, 결국 그로부터 ‘떠난다’는 것은 어떤 경험이었나요?
선생님으로부터 앞으로도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을 알았지만, 그와 동시에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분이 예술적으로 불같은 기질이 있어서 그 힘에 매료되거나 흡수돼 뛰어들면 불에 타 죽는 나방처럼 나 자신을 잃게 될 위험도 가진 분이었어요. 창작하고 예술 하는 사람은 흡수되거나 소멸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내가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아요. 아무리 위대한 사람의 가르침을 받는다 해도 그 그늘 아래 영원히 남으면 자신을 찾을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일단 떠나야 하는 거죠. 서양에는 “아버지를 죽인다”라는 표현이 있어요. 자신이 존경하고 따르던 존재를 넘어서야만 비로소 스스로 설 수 있다는 뜻이에요. 3년쯤 공부했을 때 그분이 퇴임하면서 다른 학생들은 모두 남았지만, 저는 선생님과 고별하고 베를린으로 이주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죽 혼자 활동하고 있는 거죠.
그렇게 홀로 선 지 10년 뒤 <피아노 협주곡>이 나옵니다. 엄청난 에너지와 밀도가 전해 지는 곡이죠. 처음에는 난해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거듭 들을수록 아름다움의 스펙트럼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피아노 협주곡> 영상에 이런 댓글이 있어요. “정말로 이상한 작품이다. 너무도 아름답고 반짝이며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아름다움이 있다. 동시에 차갑고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들고, 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 같고, 어디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이 무명의 리스너가 쓴 문장이 어느 평론가의 평보다 깊이 와닿더라고요. 아름답다는 말이 이렇게 힘이 약한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곡입니다.
맞는 부분이 많은 것 같은데요?(웃음) 그 곡이 이해하기 굉장히 어려운 곡이에요. 그래서 1990년대 중반 초연 이후 어느 누구도 연주를 안 하려고 하다가 2012년에 이르러서야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처음으로 이 곡을 연주하면서 재발견됐죠. 김선욱이 이 곡의 정수를 분명하게 보여준 연주자였어요. <피아노 협주곡>에 특별히 애착이 가는 건 이 곡을 쓰던 당시에는 내가 누구인지 아무 도 몰랐거든요. 완전 무명의 젊은 작곡가였고, 처음으로 받은 큰 규모의 위촉 작업이었어요. 말 그대로 목숨 걸고 곡을 썼죠. 그 곡을 쓰면서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위가 다 고장 나고, 평생 저혈압이던 내가 작품을 마친 뒤 고혈압이 생겨 오늘날까지도 고혈압 약을 복용하고 있어요. 그만큼 스트레스가 컸던 작품인데, 지금까지도 계속 연주되고 그 빈도도 높아지니 그런 의미에서 내게 굉장히 의미가 큰 곡이에요.
말씀하신 대로 이 곡은 10년이 지나 뒤늦게 많은 이들의 극찬을 받게 되죠. 무언가를 내놓으면 즉각적 반응이 오는 요즘의 기준으로 보면 아득히 긴 시차입니다.
그렇죠. 사람들은 즉각적 반응을 선호하지만, 사실 그런 즉각적 반응은 그 속도대로 빠르게 사멸합니다. 예술에서는 더욱 그렇죠. 나 역시 예순이 훌쩍 넘었고, 활동한 지 40년이 되었음에도 그 시간을 지나오며 젊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니까요. 작품에는 이해되기까지 지나야 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발표되자마자 환호받은 작품이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관심을 받지 못하는 묘한 현상도 있고요.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아요.
한데 이렇게 결실이 빨리 맺어지지 않는 것, 노력에 대한 보상이 따르지 않는 시간들이 작곡가님께는 어떻게 다가왔는지도 궁금합니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이를 잘 견디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어요. 나는 잘 견디는 편인데요.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는 외로움을 견디는 힘인 것 같거든요. 그것이 없다면 타인의 인정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고, 자신의 것을 지키기보다 남의 시선을 기준으로 자신의 것을 만들어가게 됩니다. 이런 태도로는 진정한 예술가가 되기 어렵다고 봐요. 외로움을 견딜 줄 알아야 하는데,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잘하는 게 그거 같아요. 외로움을 견디는 것. 나는 외로움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그 상태에 익숙해요. 제가 겉으로 보기에는 인정받고 성공하려는 듯 보일지 모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나의 동기는 거기에 있지 않아요.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이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곡을 쓰고, 음악을 조금씩 더 이해해가는 과정 자체에서 큰 기쁨을 느낍니다. 그 과정이 저를 충만하게 하고요. 그러니 밖에서 누가 무엇을 말하든 제게는 중요하지 않은 거죠.
단순히 인정 욕구를 떠나 창작자가 인정받지 못하면 그다음 작업을 기약하기 어렵기도 하잖아요. 특히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야만 하는 작곡가라면 더더욱 그렇고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기회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다만 기회를 기회라고 인식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의 문제 같아요. 많은 사람이 이미 주어진 기회가 있음에도 더 큰 기회, 더 큰 인정을 좇느라 애쓰는 경우가 많잖아요. 누가 봐도 기회여야 기회인 건 아니에요. 자신이 꼭 하고 싶은 말이 분명하고, 그것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기회는 도처에 있다고 봐요. 작곡계만 봐도 일거리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내 생각에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회는 많아요. 문제는 그 기회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잡은 기회를 스스로를 위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데 있죠. 하나의 기회가 주어지면 최선을 다해 그 기회가 또 다른 기회를 낳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이어가는 경우가 드물더라고요.
첫 오페라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완성하는 데 7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죠. 큰 프로젝트를 통해 창작의 세계가 넓어짐을 경험하기도 하셨습니까?
오페라를 작업한 게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죠. 워낙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여러 차원의 요소가 동시에 작동하는 작업이잖아요. 오페라를 처음 쓰는 데다 경험도 없었기에 여러 면에서 쉽지 않았죠. 처음부터 호평받은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악평이 많았죠. 당시 현대음악 오페라에서 보기 드문 스타일의 곡이라 “이게 무슨 현대음악이냐”라는 말도 들었어요. 하지만 작품의 생명력은 평론가의 말로 결정되는 게 아니죠. 호평받는다고 좋은 작품이 되는 것도, 악평받는다고 나쁜 작품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작품이 가진 자체의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평과 무관하게 정말 좋지 않은 작품이라면 다시는 연주되지 않을 것이고, 좋은 작품이면 아무리 막아도 연주되는 거거든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초연 후 몇 년 뒤 제네바에서 다시 공연되었고, 이후 LA 등 미국 여러 도시를 거쳐 독일, 최근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새로운 연출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내년에는 프랑스에서 프랑스어 버전 공연도 예정돼 있고요. 작품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어요. 나 스스로도 내 작품이 어떤지 알기 위한 시간도 필요하고요. 다시 말하지만, 그에 비해 인간의 삶이 너무 짧죠?(웃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초연 당시 아시아 여성이 작곡했다는 사실도 논란이 됐죠. 그러니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마치···.
영국인들의 유산이죠.(웃음) 오페라 작업 과정에서 사람들의 편견이 얼마나 깊은지 실감했어요. 다행히 2016년 이후 미투 운동이 확산되면서 여성에게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는 백인 남성 중심의 헤게모니 시스템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잖아요. 근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할 때만 해도 2000년대 초였으니까요. “왜 한국 여성이 영국 이야기를 다루느냐, 한국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어요. 물론 내가 한국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영국의 이야기도 할 수 있죠. 의아한 건 서양 남성 작곡가가 동양의 이야기를 다루는 일에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잖아요. 그간 역사 속에서 서양은 마치 전 세계의 것을 다룰 권리를 가진 듯 행동했고, 우리는 ‘이국적인 것’, 더 정확히는 ‘그들 취향에 맞는 이국적인 것’을 제공해야 하는 존재로 머물러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는 거예요. 보다 거시적인 큰 주제나 서양의 고전을 다루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당시 극장 측의 반발이 굉장히 심했어요. 일반적으로 오페라극장은 시즌 라인업에 필요한 주제나 장르를 정해두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작곡가에게 의뢰하는 경우가 많지, 작곡가 스스로 선택한 주제와 작품을 들고 와서 무대에 올리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이에요. 그래서 처음 LA에서 공연하기로 계약까지 다 하고 엎어졌고, 이후에 지휘자 켄트 나가노가 바이에른 주립 오페라극장 상임 지휘자가 되면서 공연을 올리려고 했지만, 바이에른에서도 이를 문제 삼고 반발이 컸죠. 젊은 동양 여자 작곡가가 영국의 고전으로 쓴 오페라를 오페라 페스티벌의 오프닝으로 올리겠다는 건 당시 페스티벌 문을 닫겠다는 거였어요. 그럼에도 켄트 나가노 덕분에 우여곡절 끝에 무대에 올릴 수 있었죠. 당시 일곱 차례 공연했는데 청중 반응이 굉장히 좋았어요. 그렇게 지금까지도 이 작품은 계속 공연되고 있고, “왜 한국 사람이 영국 이야기를 다루느냐”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은 이제 없죠.
오래 살아남아야 되는 거네요.
오래 살아 남아야 하죠. 내가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살아남는 작품을 남겨야 하는 거예요.
반발 속에서 투쟁적인 마음은 생기지 않으셨어요?
반발이 있더라도 계속해서 내 일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게 중요한 거죠. 이 세상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줄 거라는 기대를 버려야 해요.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 작품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시작하면 힘들지 않아요. 오히려 너무나 많은 이해와 인정을 바라면 상처받게 되는 거죠.
서울시향 상임 작곡가로 활동하던 때는 육아와 작업을 동시에 하던 시기였지요. 왜 흔히 성공한 예술가에게는 ‘완벽히 분리된 작업실과 충분히 보장된 몰입의 시간’이 주어질 거라는 편견이 있습니다. 작곡가님 역시 메이드 3명이 상주하며 집안일을 돌보고, 작곡가님은 방문을 걸어 잠근 채···.
(크게 웃음) 우리 집엔 청소해주는 사람도 없어요. 가족이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편과 둘이 갓난아이 키우며 여러 일을 감당해야 했어요. 다들 그렇듯이요. 서울시향에 합류하고 임기 마지막 즈음에는 ‘내 인생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나’ 싶은 한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어요. 한데 그 또한 다 지나간 일이죠. 남은 것은…. 서울시향에서 보낸 10여 년은 아주 귀한 시간이었죠. 나 같은 사람이 감히 어떻게 정명훈 선생님과 같이 일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영광이었습니다. 서울시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음악적으로도, 동시에 인간적으로도 크게 성장한 시기였죠.
작곡은 고도의 집중과 고립을 요구하는 작업인데, 동시에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너무나 자질구레한 일들로 채워져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그런 의미에서 나를 예술가라고 할 수가 없는 게, 실제로 서양 동료들을 보면 작품을 쓸 때 대단히 엄격한 환경을 만들고,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작업하거든요. 근데 저는 아이가 어릴 때는 그냥 제 책상 옆에서 아이는 놀고 나는 곡을 썼어요. 곡을 쓰는 동안에 집중하기 위해서 아무도 방에 못 들어오게 한다? 그런 식의 환경이 내 삶을 통틀어 가능한 때가 없었어요. 왜 우리 어릴 때, 1960년대에 자기만의 방이 어디 있어. 한방에서 온 가족이 함께 자고, 먹고, 공부하는 방이 침실이자 주방이자 공부방이었잖아요.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조건이 갖춰지지 않아도 작업에 몰입할 수 있는 힘이 길러졌지 싶어요.
2024년에는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수상이라는 영광스러운 순간도 맞이하셨죠. 많은 이들이 그 순간을 한 예술가의 정점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도 있죠.
창작하는 예술가가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때는 없죠. 제 추측이지만, 노벨 물리학상이나 화학상을 받은 과학자들은 무엇인가를 크게 성취했다고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창작은 끝이 없기 때문에 적어도 완결에 도달했다고 말하는 창작자는 없을 거예요. 물론 지멘스상은 독일에서 매우 권위 있는 상이고, 그 의미는 분명히 크죠. 한데 나는 아직도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독일에서 내 입지가 그렇게 탄탄하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에 그 상이 주는 의미가 큰 건 맞아요. 그럼에도 상은 그저 상일 뿐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작 나는 잘 모르겠어요. 절대로 쉽지 않아요. 특히 전통적으로 서양 남성들이 전유해 온 작곡이라는 영역을 외국인, 그것도 동양 여자로서 해나가는 일은 쉽지 않아요. 아직까지도요.
그럼에도 동시에 1985년 한국을 떠나던 당시의 나로부터 아주 멀리왔다는 느낌은 받지 않으셨나요?
상을 받으면 자랑스럽거나, 기쁜 마음보다 만감이 교차하죠. 특히 지멘스 상은 유럽인 외에는 받은 적이 없는 상이니까. 그만큼 유럽 사회가 아시아인들에게 발 딛기 힘든 땅이라는 것을 의미해요. 그렇기에 수상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내가 40년 만에 드디어 독일 땅에 발을 디뎠구나.’ 라는 생각은 들었어요.
2025년 5월에 초연한 오페라 <달의 이면(Die dunkle Seite des Mondes)>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후 18년 만의 오페라이자, 이야기부터 대사까지 모두 직접 쓴 작업입니다. 심지어 공연 시간이 3시간이 넘죠. 이 작품은 결과보다도 작곡가님께 과정이 더 길게 남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한 작품에 몰입한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처음 해보는 상당히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쓸 때 대본 작업에 관여해 원전에 없는 요소를 많이 추가하긴 했지만, 기본적인 틀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바탕으로 한 작업이에요. 그런데 <달의 이면>은 기존 소설을 바탕으로 리브레토를 쓴 것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를 창작하고 시놉시스를 쓰고, 다시 이야기를 정리해 리브레토를 쓰고, 거기에 음악을 붙였습니다. 창작하려면 진정 이렇게 해야 하는게 아닌가, 오페라라는 장르가 본래 이런 방식이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잘 알려진 소설이나 영화에 음악을 덧입히는 것이 아니라, 없던 이야기를 처음부터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진짜가 아닌가 싶었어요.
사실 이렇게 된 건 리브레토를 쓰기로 한 사람이 초연을 3년 앞두고 그만뒀기 때문이에요. 이미 초연 날짜는 잡혀 있었고, 그 시점이면 리브레티스트가 작업을 시작해도 작곡이 가능할지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죠. 그 뒤로 몇 달 동안 후임을 찾았지만 쉽지 않았고, 결국 마지막에 제가 직접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했을 때 남은 시간은 20개월뿐이었어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작업을 해야 했어요.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고 작업했습니다. 오늘이 2월 10일이죠? 정확히 1년 전 오늘, 마지막 한 장을 더 써야 하는 상황에서 집에 혼자 있다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어요. 혼자 있을 때라 더 위험했죠. 며칠 뒤 다시 책상 앞에 앉았고, 결국 마지막 장을 마쳤습니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다다르면, 자기 안에 있는 어떤 잠재력을 몇 배로 끌어다 쓰게 되는 것 같아요. 너무 힘들어서 ‘이게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는 느낌이 있었어요.
2030년까지 위촉 일정이 모두 차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빈 오선지를 대면할 때 어떤 기분이 드나요?
아…. 끔찍해요. 작품을 시작하기 전은 항상 가장 끔찍해요. 일단 오선지에 첫 음을 쓰기 시작하면, 그래도 붙잡을 지푸라기라도 있잖아요. 그런데 시작하기 전에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힘들어요. 그 무한한 가능성 앞에 서 있는 상태가 오히려 더 두렵고 버겁습니다.
망망대해에서 결국 첫 음은 어떻게 시작되나요?
망망대해에서 헤매고,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시간은 반드시 있죠. 그 괴로움이 극도로 치달으면, 아이디어가 반드시 나와야 하는 순간이 와요. 머릿속에서 어떤 임계점 같은 게 생기는 거죠. 그러니 그때까지는 괴로워해야 해요. 조금이라도 덜 괴로우면 그 순간이 오지 않아요. 아이디어가 충분히 성숙해서 스스로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아이를 낳는 것과 같아요. 아이가 다 자라서 나와야 할 순간이 있잖아요. 그거와 똑같아요.
그렇다면 그 망망대해의 시간도 이제는 전처럼 두렵기만 하지는 않으시겠네요. 결국은 나온다는 걸, 그 임계의 순간이 온다는 걸 경험으로 아시니까요.
맞아요. 스트라빈스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렇게 힘들어야 결국 언젠가는 된다는 것,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때가 반드시 온다는 확신이 생긴다는 것에 대해서요. 그게 젊었을 때와 나이가 들었을 때의 차이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 확신이 없었다면, 지금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믿음이 있는 거죠. 그런 게 좋네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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