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정혜원 작가] 내 방 절반은 작업대가 차지하고 있다. 드로잉에 알맞게 세팅돼 있는데, 큰 그림에 욕심이 나서 장만한 1200×600밀리미터의 널찍한 책상이다. 그 위에 세 브랜드의 색연필 세트가 가지런히 쌓여 있다. 아래부터 더웬트 수채 72색, 파버카스텔 수채 120색, 까렌다쉬 유성 100색 세트다. 그 옆엔 낱색 색연필도 몇 묶음 놓여 있다. 쉽게 찾을 수 있게 같은 브랜드, 같은 색 계열끼리 정리해 뒀다. 책상 한가운데에는 800×550밀리미터 크기의 합판 패널이 자리하고 있다. 그 밑에는 벽돌 몇 개를 받쳐 뒀는데 합판의 각도를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책상 가장자리에는 태블릿 PC를 고정할 수 있는 클립형 거치대가 있다. 그림을 그리면서 드라마를 보는 습관이 있어서 설치했다. 손을 움직이는 동안 눈은 그림과 영상을 오가는데, 사실 드라마는 보는 게 아니라 거의 듣는 수준이다.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유화를 그렸었다. 졸업 후에는 좁은 방에 캔버스를 펼쳐 놓을 여유가 없어서 관뒀다. 그래도 학교에서 쓰던 물감들을 한동안 소중히 간직했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물감이 굳어 버려 어느 순간 다 버렸다. 다신 유화를 그리지 않을 거라 단정 지었던 모양이다. 붓 세척통이나 기름통 같은 것도 함께 버렸는지 이제 남아 있는 게 없다. 아직 있었더라도 낡고 끈적여서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로 또 시간이 흘러 다시 유화가 당겼다. 드로잉 말고 다른 그림을 그려 보고 싶었다. 저렴한 유화 도구를 새로 갖췄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유화 도구는 옷장에 처박히는 신세가 됐다. 잘하고 싶은 마음만 앞선 채 결과물이 도무지 마음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옷장에 들어가게 된 그림 도구는 그 밖에도 많다.
내 옷장에는 옷 대신 그림 도구들이 가득하다. 원래 꾸미는 데는 관심이 없었지만 점점 더 관심이 없어져 이제는 기본 티셔츠나 언더웨어가 아니면 거의 사지 않게 됐다. 반면 그림 도구는 자꾸만 늘었다. 책상 서랍과 책꽂이를 채우고도 둘 공간이 모자라 결국 옷장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옷이나 가방, 신발을 안 산다고 검소한 게 아니었다. 옷장에 가득 들어찬 자질구레한 도구들을 보고 있으면 자기 환멸과 함께 이것이야말로 사치의 극치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림 도구만큼이나 옷장에서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것이 금속 공예 도구다. 처음에는 금속을 자르고 다듬을 톱과 줄 몇 개로 단출하게 시작했는데, 배우면서 점점 욕심이 생겼다. 자르고 나니 이제는 붙이고 싶어져서 토치를 샀고, 동을 다루다가 은을 다루게 되니 더 곱게 연마하고 싶어져서 핸드피스를 샀다. 왁스를 정교하게 조각하고 싶어져서 인두기를 샀으며 완성된 조각을 더 말끔히 마감하고 싶어져서 세척기도 샀다. 도구라기보다는 기계나 장비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그림과 금속공예, 이 양대 산맥 외에도 사진이니 판화니 제본이니 이것저것 집적대며 자잘하게 사들인 도구가 참 많다. 지금 이 순간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하나씩 스쳐 지나가는데 다 언급할 수가 없다. 너무 많기도 하고, 내 돈지랄이 부끄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유화는 방이 비좁아서 할 수 없겠다고 일찌감치 포기했었는데, 이 많은 잡다한 도구를 방에 들여놓지 않았다면 유화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저 단순하게 유화 작업이 내키지 않아서 안 했던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이 모든 도구들이 지금은 제 역할을 못 한 채 그냥 방 안에 방치돼 있다. 그 방은 본가에 있다.
나는 본가를 떠나왔다. 그래서 도구들과도 생이별을 하게 됐다. 내 설렘과 기대, 애정이 듬뿍 담겼던 도구는 이제 멀리 떨어져 있어 쉽게 손에 잡을 수 없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모든 것이 전부 다 헛것이었음을,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나온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허무하지만, 그래도 도구들에 대한 내 애틋함과 그리움은 거짓이 아니다. 부모님보다 그 도구들이 더 보고 싶고 안부가 궁금하다.
다행히 아직 완전한 이별은 아니다. 본가에 가면 아직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다만 그중에서 무엇을 데리고 나오면 좋을지 잘 모르겠다. 내게 가장 필요한 것, 즉 가장 하고 싶은 작업은 무엇일까? 전부인 것 같기도, 다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고, 뭘 어떻게 하면 되는지도 모르겠다. 당분간은 떠나온 곳은 돌아보지 말고 지금 눈앞에 놓인 현실만 직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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