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부쩍 부드러워졌다. 필자가 자주 오가는 경복궁 일대에도 날이 풀리면서 달리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무거운 외투를 벗고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계절을 통과하는 사람들. 달리기 좋은 날씨라는 것은 어쩌면 다시 몸을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돌아오는 시기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겨우내 움츠렸던 러닝 욕구를 슬슬 끌어올려본다.
흔히 '운동은 장비발'이라고 한다. 운동 퍼포먼스나 효능감을 위해 좋은 장비를 구입하는 욕구를 뜻하는 말이다. 필자의 입장은 그것과 반대다. 스스로를 자연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필자 만큼 운동에 돈을 안 들이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러닝도 마찬가지다. 혹자는 보여주기 위해 혹은 커뮤니티로서의 효능감을 위해 (그런 것들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내 스타일이 아닐 뿐이다) 러닝을 누리기도 하지만 필자에게 러닝은 단순히 스스로를 위한 맨몸 운동이자 습관일 뿐이다.
사소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과욕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뭘 하나 사더라도 '진짜 필요한가?' 숙고하게 된다. 그런 필자가 러닝 조끼를 샀고 잘 쓰고 있다. 운동은 의지이지 장비발이 아니라고 굳게 믿는 필자가 러닝 조끼를 사서 애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년 이맘때 러닝 조끼를 샀다. 거창한 브랜드 제품은 아니다. 온라인에서 2만원이 조금 넘는 가격에 구입했다. 디자인은 특별할 것 없이 무난하다. 연한 회색에 군더더기 없는 형태며 몸이 닿는 안쪽 부분은 메시 소재로 되어 있어 통기성이 좋다. 러닝할 때 입는 옷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마음에 들었던 건 수납 구조였다. 앞쪽 포켓들이 직관적으로 나뉘어 있어 스마트폰과 지갑, 물티슈 등을 나눠 넣기 좋다. 그리고 뒤쪽에는 크기와 부피가 있는 물건을 넣을 수 있는 주머니가 있다. 지퍼까지 달려 있으니 쏟아질 염려도 없는 안전한 공간이다.
러닝 조끼는 두 어깨에 걸고 앞섶 버클을 조여 몸에 딱 맞게 채우는 형태다 보니 달릴 때 흔들림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편안함을 느낀다기보다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아이템인 셈이다.
사실 그 전에도 러닝 아이템을 몇 가지 사봤다. 허리에 차는 러닝벨트나 팔에 거는 러닝 스트랩 같은 것들이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실제로 달리다 보니 작은 불편들이 하나둘 느껴졌다.
스마트폰을 담은 러닝벨트는 무게 때문에 미묘하게 허리에서 흔들리고 스트랩은 팔에 맺히는 부직포 부분이 헐거워졌다. 사소한 차이 같지만 달리기를 할 때는 이런 부분이 꽤 크게 느껴진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러닝 조끼였다. 몸에 밀착되고 양손은 자유롭고 수납은 훨씬 안정적이다.
그런데 러닝조끼의 장점은 단순히 물건을 넣을 수 있다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나에게는 조금 사적인 즐거움이 하나 더 생겼다. 달리기를 하러 나갈 때 책 한 권을 넣어 갈 수 있다는 점이다. 조끼 등 포켓에 얇은 책을 넣고 집을 나선다.
한껏 달리고 나면 카페에 간다. 뭐 하나 해냈다는 스스로의 뿌듯함에 보상을 준다. 카페에서 아메리카노와 작은 빵을 시킨다. 만약 책이 없다면 스마트폰 SNS를 보며 시간을 그저 흘려보냈을 텐데, 이상하게 그 순간에 책 한 권이 있다면 펼쳐보고 싶어진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처럼 기분 좋은 몸의 리듬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 필자만의 미션인 것이다.
숨을 고르는 동안 몇 페이지를 넘긴다. 어차피 벽돌책처럼 두꺼운 책을 들고 나온 게 아닌 한 손에 들어오는 판형의 책인지라 적당히 보다가 자리를 일어나도 괜찮다. 보통 필자는 러닝용 책으로 단편소설집이나 얇은 판형의 인문 앤솔로지 등 파편적으로 20~30분 읽고 떠나기 좋은 책들을 가져가는 편이다.
아무래도 호흡이 긴 책은 자투리 시간을 통해 읽어내기엔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렇게 운동과 독서가 한 번의 외출 안에 들어오는 아침 풍경이 필자에게 주어진다. 러닝 조끼 한 벌이 없었다면 벌일 수 없는 장면이다.
러닝화는 러닝을 시작하게 하는 용품이다. 발을 보호하고 몸의 균형을 잡아주며 오래 달릴 수 있게 도와준다. 말 그대로 달리기를 가능하게 만드는 필수품이다. 반면 러닝 조끼는 조금 다르다. 그것이 없다고 달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러닝조끼가 있으면 달리기의 방식이 달라진다. 필요한 것을 챙길 수 있고 달리기 이후의 시간을 준비할 수 있다. 러닝화가 러닝의 기능을 책임진다면 러닝조끼는 러닝의 생활을 확장시킨다. 그러므로 필자에게 러닝 조끼는 단순한 러닝 용품이 아니라 ‘러닝 라이프스타일'의 시작이었다.
저마다 그런 물건들이 있을 것이다. 단지 실용적이라서 혹은 편해서나 예뻐서가 아니라 이 물건으로 인해 다른 차원의 문이 하나 열리게 된 경우 말이다. 우리는 비싼 물건이 우리의 삶을 다른 경지로 이끈다고 으레 생각한다.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다. 허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심이다. 그 물건에 내 진심을 얼마나 담느냐에 따라 삶은 그런 사소한 감각으로 달라진다. 적어도 필자의 경우에는 (늘) 그러했다. 러닝 조끼도 그러했다.
☞앤솔로지=시, 소설 등 문학 작품을 하나의 주제 아래 모아놓은 작품집을 말한다. 흔히 선집 또는 사화집으로 번역된다.
여성경제신문 권혁주 쇼호스트
kwonhj1002@naver.com
권혁주 쇼호스트·방송인
동국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한 후 SBS강원(G1), CJ헬로비전 등에서 아나운서로 방송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CJ ENM, 현대홈쇼핑+, 더블유쇼핑 등에서 홈쇼핑 및 라이브커머스 쇼호스트로서의 방송 경력을 거쳐 현재는 프리랜서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방송활동에 겸하여 서촌에서 ‘이상서전’이라는 독립서점을 운영하며 매주 한 권의 책을 큐레이션하는 독특한 콘셉트로 정체성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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