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총연합, 강원도 지역 기독교 근대 문화유산 답사
'김일성 별장'으로 쓰인 선교사 휴양지…셔우드 홀 문화공간 들어서
양양·강릉엔 조화벽·안경록 등 기독교인이 주도한 만세운동 흔적
(춘천·고성·양양·강릉·원주=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감리회는 강릉에 지부를 세우는 것을 고려하다가 왕래가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했습니다. 교통 문제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말 한 필과 사람 한 명을 구하는 데 하루에 25센트를 지불했지만 이제는 70센트가 필요합니다."
1908년 강원도 원주에 잠시 주재했던 미국 선교사 아서 웰본(오월번)은 미국에 보낸 편지에서 강릉 등 영동지역 선교의 어려운 지리 여건을 설명했다. 험준한 태백산맥을 넘어야 하는 영동은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었으니 멀리 한반도로 온 외국인 선교사들에겐 그야말로 벽지 중의 벽지였을 것이다.
이러한 여건 탓에 한반도의 개신교 선교 지형도에서 불모지와 같았던 강원도, 특히 영동지역에도 뒤늦게 발길이 닿은 선교사들이나 권서인(勸書人·성경 등을 나눠주거나 팔면서 전도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전파됐고, 의료 선교를 꽃피우거나 항일 운동의 토대를 마련하면서 지역에 자리잡았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은 지난 9∼10일 강원도 곳곳에 남은 근대 문화유산 등을 통해 강원 지역 개신교 역사를 돌아보는 답사를 진행했다.
◇ 선교사 휴양소 있던 화진포에서 기리는 셔우드 홀
강원도 고성 화진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암벽 위엔 유럽의 작은 성처럼 보이는 2층 석조 건물이 있다. 1948∼1950년 김일성 가족이 여름 휴양지로 썼다고 해서 '김일성 별장'으로 유명한 이 '화진포의 성'은 원래 1938년 독일인 베버가 선교사 휴양시설로 지은 것이다.
건축을 의뢰한 사람은 국내에 크리스마스실을 처음 도입하는 등 결핵 퇴치를 위해 힘썼던 캐나다 출신 미국 감리회 의료 선교사 셔우드 홀(1893∼1991).
청일전쟁 후 평양에서 환자를 치료하다 전염병에 걸려 숨진 윌리엄 제임스 홀(1860∼1894)과 한국 최초 맹아학교와 한글 점자 등을 만든 로제타 셔우드 홀(1865∼1951) 의료 선교사 부부 사이에서 한국서 태어난 셔우드 홀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공부한 후 선교사로 다시 한국을 찾았다.
어머니가 키운 한국 최초 여의사 박에스더(김점동)가 결핵으로 숨진 후 결핵 퇴치에 헌신하기로 하고 1928년 국내 최초 근대 결핵 요양원인 해주구세요양원을 설립했다.
1940년 일제에 간첩 혐의로 추방된 뒤 인도를 거쳐 미국서 말년을 보낸 그는 별세 후 유언에 따라 한국 양화진외교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분단의 상처를 안고 이젠 관광명소가 된 '화진포의 성'과 지난해 6월 인근에 문을 연 '화진포 셔우드 홀 문화공간'에는 "나의 청진기로 조선 사람들의 심장을 진찰할 때면 내 심장도 조선과 함께 뛴다"고 말했던 셔우드 홀과 어머니 로제타 홀의 흔적이 담겼다. 로제타 홀에는 한국에서 쓴 일기와 편지, 한복을 입은 어린 셔우드 홀의 사진, 숭례문이 담긴 최초의 한국 크리스마스실 등이 전시됐다.
김정석 한교총 대표회장은 홀 선교사 가족에 대해 "우리나라가 어려웠던 시기에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제됐던 시각장애인이나 여성 등에게 관심을 가졌다"며 "개신교 역사뿐 아니라 한국 근대사에서 소중한 분들"이라고 말했다.
강원 지역에서 근대 의료 선교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장소는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내에 있는 모리스(1869∼1927) 선교사 사택.
1918년 건립돼 2017년 등록문화재가 된 모리스 사택은 1913년 앤더슨 선교사가 세운 서미감병원이 현재 강원 영서지역 유일의 상급종합병원이 되기까지의 자취를 담은 의료사료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1908년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가 춘천에 설립한 예수교병원이 있던 자리는 지금 춘천미술관 건물로 변했다. 빨간 벽돌 외관이 눈에 띄는 이 건물은 1898년 설렵돼 현재 강원도에 남은 가장 오래된 교회인 춘천중앙교회 예배당으로도 한때 쓰였다.
◇ 독립선언문 숨겨온 조화벽…장날 태극기 뿌린 안경록 목사
산맥에 가로막힌 영동지방엔 선교뿐 아니라 일제시대 만세운동도 한발 늦게 당도했다. 여기에도 기독교가 주요한 고리가 됐다.
양양군 현북면 만세고개에 있는 만세운동 유적비엔 그 어느 곳보다 치열했던 양양 만세운동의 기록이 담겨 있다.
3·1운동 한 달 후인 1919년 4월 4일 시작된 양양 만세운동엔 연인원 1만5천여 명이 동참했고 10명 안팎의 사망자가 나왔다.
양양 만세운동에서 핵심운동을 한 인물은 유관순의 올케이기도 한 조화벽(1895∼1975). 감리교 전도사인 아버지와 전도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 선교사가 개성에 세운 호수돈여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 양양으로 왔다. 그는 버선 속에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감리교회 청년 지도자들에게 전달했고, 지역 유림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보다 앞서 강원 고성에서도 개성에서 학교를 다녔던 이동진 전도사가 고향에 내려와 지역 청년들과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4월 2일 강릉에도 불길이 옮겨붙은 만세운동의 구심점은 안경록(1882∼1945) 목사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로 날조해 신민회 회원 105명을 체포한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안 목사는 1915년부터 강릉에서 목회 활동을 벌였다. 3·1 운동 후 교회 청년들을 규합해 시위를 계획했고, 장날 태극기를 뿌리며 시위를 주도했다.
강릉중앙교회에선 안 목사의 흉상과 함께 그가 제5대 목사로 재임하던 1921년 예배당 건립 당시의 머릿돌 등을 만날 수 있다.
교회사 박사인 홍승표 아펜젤러 인우교회 목사는 "고성, 양양, 강릉은 강원 지역에서 기독교가 3·1 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지역"이라며 "신앙에 입각해 새로운 나라에 대한 열망과 비전을 품고 이를 고향에 펼쳤다"고 설명했다.
mihy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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