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고예인 기자 | 중동 지역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도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업계에서는 당장 생산 차질로 이어질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나오지만 일부 핵심 소재와 장비 공급망이 특정 지역에 집중돼 있다는 점에서 산업 구조의 취약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인공지능 AI 반도체 수요 확대와 함께 반도체 생산량이 빠르게 늘고 있는 상황에서 공급망 리스크가 현실화할 경우 산업 전반에 미치는 영향도 과거보다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 헬륨·브롬 높은 중동 의존도
10일 한국무역협회와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일부 핵심 산업용 가스와 화학 소재의 중동 의존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품목은 헬륨이다. 헬륨은 반도체 웨이퍼를 냉각하고 장비 내부 온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사용되는 필수 산업용 가스다. 반도체 공정 미세화가 진행될수록 온도 관리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헬륨 수요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통계에 따르면 국내 헬륨 수입의 약 64.7%는 카타르에서 들어온다. 카타르는 세계 최대 액화천연가스 생산국 가운데 하나로 천연가스 정제 과정에서 헬륨을 대량 생산하는 대표적인 공급국이다.
반도체 식각 공정에 사용되는 브롬 역시 중동 의존도가 높은 소재다. 브롬은 반도체 회로를 미세하게 깎아내는 식각 공정에 사용되는 화학 소재다. 국내 브롬 수입의 약 97.5%는 이스라엘에서 공급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에서는 특정 소재 공급이 흔들릴 경우 반도체 생산 일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은 공정마다 다양한 소재가 연쇄적으로 투입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 장비 거점도 변수
장비 공급망 역시 변수로 지목된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인근에는 글로벌 반도체 장비 기업들이 다수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반도체 공정에서 사용되는 측정 장비와 검사 장비의 주요 생산 거점이다.
일부 장비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생산라인에도 공급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측정과 검사 장비는 공정 수율을 관리하는 핵심 장비다. 미세 공정으로 갈수록 공정 데이터를 정밀하게 분석하는 장비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AI 반도체 수요 확대가 공급망 리스크를 키울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고대역폭메모리 HBM과 첨단 패키징 생산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I 서버용 반도체 생산이 늘면서 산업용 가스와 공정 소재 수요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며 “특정 소재 공급이 흔들리면 생산 계획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구조”라고 말했다.
◆ 유가 상승 물류 비용 압박
에너지 가격 상승도 잠재적인 변수로 꼽힌다. 중동 긴장이 장기화할 경우 국제유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AI 반도체 생산 공정은 대규모의 전력과 가스를 필요로 하는 에너지 집약 산업인 만큼 전기요금 상승이 곧 생산비 증가로 이어진다.
아울러 유가 상승은 단순한 에너지 비용 증가에 그치지 않는다. 해상 운임과 항공 운임 상승으로 이어지면서 반도체 장비와 소재 운송 비용도 함께 높아질 수 있다.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의 주요 생산 거점의 전력 비용은 국제 에너지 가격과 밀접하게 연동된다. 업계에서는 전력 비용 상승이 초미세 공정 가동률과 고부가가치 제품 수익성에 영향을 줄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22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우크라이나산 네온가스 공급이 차질을 빚으며 반도체 핵심 소재 가격이 급등한 사례가 있다. 네온은 반도체 노광 공정에 사용되는 가스로 당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다만 업계에서는 당장 생산 차질로 이어질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는 평가다. 이는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핵심 소재와 장비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재고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 정부도 상황 점검에 나섰다. 산업통상자원부는 헬륨과 브롬 반도체 측정 장비 등 중동 의존도가 높은 14개 품목을 중심으로 수급 상황을 점검하고 공급망 대응을 강화하기로 했다. 일부 장비와 부품은 미국과 유럽에서 대체 수입이 가능하고 브롬 등 정밀 화학 소재 역시 국내 생산과 재고 활용을 통해 단기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구조를 다시 점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산업은 소재와 장비 생산 공정이 긴밀하게 연결된 구조”라며 “핵심 소재 몇 가지 공급만 흔들려도 생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만큼 공급망 다각화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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