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리더의 생각]‘내쳐 진격했다면…’이라는 역사적 상상에 대한 반론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왜적은 평양성에서 몇 날 며칠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민심도 차츰 수습되고, 남은 군사들을 재정비하면서 명나라의 구원병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이야말로 나라의 회복에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는데, 이는 참으로 하늘이 도운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 조선은 천운의 도움을 받았다며 〈징비록〉에서 위와 같이 주장했다.
송복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이 주장을 키웠다. 그는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에서 “이는 정녕 미스터리이고 수수께끼 중의 수수께끼”라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평양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고니시 유키나가가 어째서 평양에서 그대로 멈추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왜군의 진격을 멈추게 했을까. 무엇이 고니시 유키나가로 하여금 평양에 엎드려 쥐 죽은 듯이 자취를 감추고 가만히 있게 했을까.”
그는 “평양에서 조선왕이 피난해 있는 의주까지의 거리는 200킬로미터를 조금 넘어선다”며 “지금까지의 속도로 평양에서 그저 밀고 나오기만 해도 10일이면 얼마든지 의주에 당도할 수 있는 거리”라고 설명했다. 만약 고니시 유키나가가 의주까지 진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는 “틀림없이 선조는 신하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명으로 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랬다면 조선은 없어졌을 테고, 일본과 명에 의해 분할됐으리라고 답한다.
전쟁의 승패는 일련의 전투로 결판이 난다. 전투를 뒷받침하는 것이 병참, 즉 군사 작전에 필요한 인원과 물자를 관리, 보급, 지원하는 일이다. 과거 병참의 핵심은 군량이었다. 송 명예교수도 이를 잘 안다. 그는 앞서 인용한 책의 한 장 ‘전쟁은 군량이다’를 병참에 할애했다.
◇상반된 사료 전혀 언급하지 않아
그는 그러나 일본군의 군량 보급에 대한 상반된 기록은 다루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임진난의 기록〉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이 책은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평양에 이르기 전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때 조선에 와 있는 일본군 병력이 이미 14만여 명에 달했기 때문에 그 많은 병사를 충당하기 위한 식량이 부족했다. 더욱이 그해 조선의 농민들은 겁을 집어먹고 곡식의 씨를 뿌리지 않았으며, 밀은 제때 베지 않아 썩었고, 많은 식량이 조선인에 의해 불태워졌다.”
“심각한 식량 부족으로 말미암아 많은 병사가 병들어 그야말로 내버려진 상태로 죽어가고 있었다. (중략) 조선군은 처음에는 일본군을 아주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으나 복종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매우 격렬하게 저항해 일본군에게는 해결해야 할 아주 큰 문제와 어려움 두 가지가 잇따라 발생하게 됐다.”
하나는 육로를 통한 병량 수송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에 의해 차단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닷길 또한 이순신 장군에 의해 막힌 것이었다.
육로와 관련해 프로이스는 “식량을 수송하는 일본군 수는 적었으며, 자국의 지리를 매우 잘 알고 있는 조선 병사들이 여러 지역에 매복해 있다가 습격해 이들 일본군을 모두 죽이고 식량을 모두 가져갔다”고 전했다. 일본군이 주둔한 곳을 제외하면 “모두 조선인들이 차지하고 있으면서 지역마다 다니며 일본군을 습격했다.” 그 결과 일본군은 300명 미만으로는 이동하지 못했고, 특히 서울에서 평양까지 구간은 500명 미만의 병력으로는 이동할 수 없었다.
바닷길은 우리가 모두 아는 것처럼 이순신 장군의 조선 해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은 5월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연거푸 일본 해군을 격파했다. 이로써 이순신 장군은 일본의 작전 계획을 무너뜨렸다. 일본의 계획은 평양 점령 이후 선조에게 보낸 고니시 유키나가의 글에서 드러난다.
고니시는 “일본 수군 10만이 또한 서쪽으로부터 몰려올 것인데 대왕은 어디로 가시렵니까?”라고 물었다(출처: 한명기, 이순신, 멸망위기의 조선을 구하다, 한겨레신문, 2012.05.25.). 일본 수군이 해상을 장악하고 참전하면서 평양 주둔군에게 군량을 공급했다면 조선은 숨통이 끊겼을 것이었다.
송 명예교수는 “평양에는 조선군이 두고 간 군량도 꽤 있었다”고 전제한다. 그 근거로 〈징비록〉의 다음 대목을 든다. “한편 임금께서 평양성에 당도할 무렵, 식량 부족을 걱정한 조정에서는 여러 고을의 전세를 평양으로 옮겨두었었다. 그 양이 무려 10만 석이 넘었는데 그것 또한 고스란히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에 대한 프로이스의 서술도 정반대다. 고니시는 “그곳(평양) 주변에 있는 작은 마을들을 찾아 돌아보고 겨울을 나기 위한 식량을 가져올 것”을 명령했다. 조선이 평양에 군량미 10만 석을 남겼다면 내리지 않을 지시였다. 군량미 10만 석은 고니시 부대가 몇 년을 먹을 분량이었기 때문이다.
서애와 송 명예교수는 일본 측 사정 및 자료를 살펴보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일본군 내부에서 제기된 군량 부족에 대해 서술하지 않았다.
◇왜군 군량 조달, 앞뒤 모두 막힌 상황
임진왜란 시기 왜군의 병량 조달 전반은 어땠을까? 이종봉 부산대 사학과 교수가 쓴 ‘임진왜란 시기 일본의 병량미 보급과 그 정책’ 논문이 이를 분석했다. 이 교수는 “풍신(豊臣) 정권은 침략전쟁을 준비하면서 약 6개월분의 병량미를 일본에서 준비하였는데, 그것은 약 30만 석이었다”며 “이러한 병량미 30만 석은 병사 약 16만 명이 6개월 정도 사용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고 전했다.
이를 조선에 수송하려는 계획은 앞서 프로이스의 책을 인용해 전한 것처럼 의병과 이순신 수군에 의해 크게 틀어진다. 그래서 “조선을 침략한 5월 이후부터 곧 약탈적 방식을 통해 현지에서 병량미를 조달하려고 하였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침략전쟁의 상황 악화는 다시 일본으로부터 병량미 조달이라는 정책으로 전환되었다”고 분석했다. 요컨대 일본의 조선으로의 병참은 앞뒤가 다 막힌 상황이었다.
평양성의 군량 상황에 대한 〈징비록〉의 서술은 정합성이 떨어진다. 조선이 남기고 간 10만 석이 있었다면 발생하지 않을 상황이 이 책에 더 서술되어 있다. 1593년 정월 명나라 이여송 대장의 공격으로 왜군은 평양성에서 패퇴한다. 류성룡은 왜군은 “군량도 떨어져 밥을 얻어먹으며 행군했다”고 썼다.
평양의 10만 석은 어떻게 됐을까? 이와 관련해 프로이스는 앞서 인용한 것처럼 “많은 식량이 조선인에 의해 불태워졌다”고 전했다. 이 서술이 사실에 부합할 듯하다. 평양성을 지키고 있던 우의정 윤두수와 도원수 김명원은 전투에서 패배해 평양성을 탈출하기 전에 “풍월루 연못에 화포를 던져버렸다”고 〈징비록〉은 기록했다. 그랬다면 군량미도 불태웠다는 설명에 개연성이 있다.
설령 평양 입성 초기에 조선의 군량미가 일부 남았다 해도 왜군에게 계속 진격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일본군은 명 정벌을 목표로 전쟁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평양은 이를 위한 전진 기지였다. 전보다 긴 보급로상에서 대규모로 오랫동안 벌어질 전투에 대비해 군량을 충분히 확보하는 활동은 일본군에게 필수적이었다.
이제 출처를 체크해보자. 출처에는 문헌은 물론이고 그 문헌을 작성한 인물도 포함된다. 프로이스는 어떤 인물이었고, 저자로서의 평판은 어떤가?
프로이스는 1532년 포르투갈에서 태어나 16세 때인 1548년 예수회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 고아로 파견됐다. 1554년에 일본으로 파견됐으나 일정에 차질이 생겨 말라카에서 체류한 뒤 다시 고아로 돌아왔다. 1563년 일본에 도착해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1565년 수도 교토에 입성한 뒤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와 친분을 쌓기도 했다. 1577년 본거지를 옮겨 규슈지역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벌였다.
송 명예교수는 “평양에는 조선군이 두고 간 군량도 꽤 있었다”고 전제한다. 그 근거로 〈징비록〉의 다음 대목을 든다. “한편 임금께서 평양성에 당도할 무렵, 식량 부족을 걱정한 조정에서는 여러 고을의 전세를 평양으로 옮겨두었었다. 그 양이 무려 10만 석이 넘었는데 그것 또한 고스란히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에 대한 프로이스의 서술도 정반대다. 고니시는 “그곳(평양) 주변에 있는 작은 마을들을 찾아 돌아보고 겨울을 나기 위한 식량을 가져올 것”을 명령했다. 조선이 평양에 군량미 10만 석을 남겼다면 내리지 않을 지시였다. 군량미 10만 석은 고니시 부대가 몇 년을 먹을 분량이었기 때문이다.
서애와 송 명예교수는 일본 측 사정 및 자료를 살펴보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일본군 내부에서 제기된 군량 부족에 대해 서술하지 않았다.
◇왜군 군량 조달, 앞뒤 모두 막힌 상황
임진왜란 시기 왜군의 병량 조달 전반은 어땠을까? 이종봉 부산대 사학과 교수가 쓴 ‘임진왜란 시기 일본의 병량미 보급과 그 정책’ 논문이 이를 분석했다. 이 교수는 “풍신(豊臣) 정권은 침략전쟁을 준비하면서 약 6개월분의 병량미를 일본에서 준비하였는데, 그것은 약 30만 석이었다”며 “이러한 병량미 30만 석은 병사 약 16만 명이 6개월 정도 사용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고 전했다.
이를 조선에 수송하려는 계획은 앞서 프로이스의 책을 인용해 전한 것처럼 의병과 이순신 수군에 의해 크게 틀어진다. 그래서 “조선을 침략한 5월 이후부터 곧 약탈적 방식을 통해 현지에서 병량미를 조달하려고 하였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침략전쟁의 상황 악화는 다시 일본으로부터 병량미 조달이라는 정책으로 전환되었다”고 분석했다. 요컨대 일본의 조선으로의 병참은 앞뒤가 다 막힌 상황이었다.
평양성의 군량 상황에 대한 〈징비록〉의 서술은 정합성이 떨어진다. 조선이 남기고 간 10만 석이 있었다면 발생하지 않을 상황이 이 책에 더 서술되어 있다. 1593년 정월 명나라 이여송 대장의 공격으로 왜군은 평양성에서 패퇴한다. 류성룡은 왜군은 “군량도 떨어져 밥을 얻어먹으며 행군했다”고 썼다.
평양의 10만 석은 어떻게 됐을까? 이와 관련해 프로이스는 앞서 인용한 것처럼 “많은 식량이 조선인에 의해 불태워졌다”고 전했다. 이 서술이 사실에 부합할 듯하다. 평양성을 지키고 있던 우의정 윤두수와 도원수 김명원은 전투에서 패배해 평양성을 탈출하기 전에 “풍월루 연못에 화포를 던져버렸다”고 〈징비록〉은 기록했다. 그랬다면 군량미도 불태웠다는 설명에 개연성이 있다.
설령 평양 입성 초기에 조선의 군량미가 일부 남았다 해도 왜군에게 계속 진격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일본군은 명 정벌을 목표로 전쟁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평양은 이를 위한 전진 기지였다. 전보다 긴 보급로상에서 대규모로 오랫동안 벌어질 전투에 대비해 군량을 충분히 확보하는 활동은 일본군에게 필수적이었다.
이제 출처를 체크해보자. 출처에는 문헌은 물론이고 그 문헌을 작성한 인물도 포함된다. 프로이스는 어떤 인물이었고, 저자로서의 평판은 어떤가?
프로이스는 1532년 포르투갈에서 태어나 16세 때인 1548년 예수회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 고아로 파견됐다. 1554년에 일본으로 파견됐으나 일정에 차질이 생겨 말라카에서 체류한 뒤 다시 고아로 돌아왔다. 1563년 일본에 도착해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1565년 수도 교토에 입성한 뒤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와 친분을 쌓기도 했다. 1577년 본거지를 옮겨 규슈지역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벌였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톨릭을 탄압한 이후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 1590년 나가사키에 정착했다.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가 1590년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 통역사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알현했다. 1592년 발리냐노와 함께 마카오에 갔다가 1595년 7월 돌아왔고, 1597년 7월 나가사키에서 생을 마감했다.
〈임진난의 기록〉은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 중 역자들이 조선과 관련된 부분을 선택해 번역한 책이다. 프로이스는 1584년 발리냐노 신부의 요청에 따라 〈일본사〉 집필을 시작했다. 역자 중 정성화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이 책에 대해 “임진왜란과 관련된 내용은 아쉽게도 1594년 초까지만 기술돼 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 의도와 준비 과정, 전쟁 발발 전 일본의 정세에 대해 상당히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다”며 “한국사 및 동양사는 물론 세계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매우 귀중한 사료”라고 평가한다.
사실 확인은 쉽지 않다. 사실 하나를 놓고 서술이 정반대로 맞설 때 더욱 어려워진다. ‘평양성 미스터리’가 이를 잘 보여준다.
〈임진난의 기록〉은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 중 역자들이 조선과 관련된 부분을 선택해 번역한 책이다. 프로이스는 1584년 발리냐노 신부의 요청에 따라 〈일본사〉 집필을 시작했다. 역자 중 정성화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이 책에 대해 “임진왜란과 관련된 내용은 아쉽게도 1594년 초까지만 기술돼 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 의도와 준비 과정, 전쟁 발발 전 일본의 정세에 대해 상당히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다”며 “한국사 및 동양사는 물론 세계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매우 귀중한 사료”라고 평가한다.
사실 확인은 쉽지 않다. 사실 하나를 놓고 서술이 정반대로 맞설 때 더욱 어려워진다. ‘평양성 미스터리’가 이를 잘 보여준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3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더리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저작권자>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광고 보고 계속 읽기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