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위선 위로 '폭탄'이 떨어졌다

실시간 키워드

2022.08.01 00:00 기준

현대인의 위선 위로 '폭탄'이 떨어졌다

엘르 2026-03-10 01:49:24 신고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숨긴, 나만의 비밀스런 욕망을 누군가에게 '들켰다'고 가정해 보자. 수치심과 더불어 드는 감정이 있다면 약간의 억울함일 것이다. 이는 분명 남들의 마음 속에도 내 욕망과 비슷한 형태의 반사회적인 무언가가 있을 거란 확신에서 기인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 존재하는 한 이런 해프닝은 언제든, 어디에서든 일어난다.


반대로 타인이 감춰둔 욕망을 목격해 버렸다면 어떨까. 필경 측은함과 함께, 나와 유사한 나약함을 확인한 데서 느끼는 동질감과 안도감이 따라올 것이다. 여기에 목격자와 욕망의 성격에 따라 '경멸'이 추가될 수 있다. 들켜선 안될 욕망을 들키고, 그로 인해 경멸당하는 건 누군가에겐 사형선고와 다를 바가 없다. 주인공이 욕망을 감출 수 없는 환경에서 산다는 설정의 일본 만화 〈사토라레〉나 영화 〈트루먼 쇼〉가 어떤 의미에선 '호러'인 이유다. 현대인에게 욕망의 표출이란 곧 약점의 노출이다. 그래서 위선은 생존을 위해 당연히 입어야 하는 갑옷과 같다. 내면에 무엇을 숨기고 있든, '그럴듯하게' 보여야 '그럴듯하게' 살아갈 수 있다.


영화 〈폭탄〉

영화 〈폭탄〉


오승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폭탄〉은 이 '그럴듯함'이라는 가치 바깥으로 타자화된 이들의 심리를 연쇄 폭탄 테러와 연결한다. 작품은 주류 판매점에서 난동을 부려 붙잡힌 주정뱅이 스즈키 타고사쿠(사토 지로)가 취조실에서 경찰과 마주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노숙자에 가까운 행색에 이상한 몸짓, 과하게 자기비하적이고 예의 바른 말투는 경찰에 붙잡히자마자 얌전해지는 평범한 주정뱅이의 전형이다. 아무리 잡범이어도 신상은 알아야 하니 이름과 주소를 묻는데, 주정뱅이가 말하길 주소는 잊어버렸고 이름은 '스즈키 타고사쿠'다. '스즈키'는 일본에서 가장 흔한 성씨 중 하나. '타고사쿠'는 옛날 일본에서 쓰이던 차별 용어로 '촌놈'이나 '얼뜨기', '잔챙이' 정도의 의미다.


영화 〈폭탄〉

영화 〈폭탄〉


이미 눈 앞의 타고사쿠가 귀찮은 존재임을 감지한 형사 토도로키(소메타니 쇼타)는 주류 판매점 주인과 적당히 합의할 것을 권한다. 토도로키가 제시한 합의금은 10만 엔 선. 하지만 타고사쿠는 100 엔도 없다며 되레 토도로키에게 10만 엔을 빌려줄 수 있냐고 묻는다. 자신은 촉이 좋아 사건이 벌어질 것을 예측할 수 있다며 돈을 꿔 주면 토도로키의 수사에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여흥 정도로 말을 들어 주는 토도로키에게, 타고사쿠는 한 시간 뒤 아키하바라에서 폭발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예언은 적중한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타고사쿠'는 단숨에 도쿄 한복판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의 중심으로 진입한다. 그가 단순 정보 제공자인지 용의자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토도로키는 타고사쿠를 구슬려 정보를 얻어내려 한다. 하지만 애초에 타고사쿠를 얕보고 있던 토도로키의 '구슬리다'는 개념은 통하지 않는다. 아주 깍듯한 경어를 쓰는 타고사쿠와 달리 토도로키는 어느 시점부터 반말로 일관했다. 눈 앞에 있는 자의 이름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마음껏 하대해도 되는 대상으로 본 것은 사회적 동물의 감각이다. 별 소득 없이 타고사쿠가 예고한 다음 폭탄이 터지고, 경시청 수사 1과의 베테랑 키요미야(와타베 아츠로)와 엘리트 형사 루이케(야마다 유키)가 사건을 인계받는다.


영화 〈폭탄〉

영화 〈폭탄〉


키요미야의 전략은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타고사쿠를 대하는 것. 정보를 캐내기 위한 연기일지라도 존대를 하고, 최대한 요구를 들어주되 자신의 요구도 노련하게 밀어붙인다. 타고사쿠는 그런 키요미야의 마음을 맞혀 보겠다며 '아홉 개 꼬리'라는 게임을 제안한다. 타고사쿠가 던지는 선문답에 응하는 사이, 키요미야는 반듯하게 정돈해둔 겉모습 속에 숨은 '악한' 욕망들이 발가벗겨지는 것을 느낀다. 어린 아이와 노숙자 중 어느 쪽의 생명을 구하겠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대부분 마음 속으로 전자를 고를 테다. 하지만 대부분이 이를 입 밖으로 내기 꺼리거나 고민하는 '척'을 할 것이다. 누군가가 '어린 아이'라고 답한다면 질문자는 '그럼 생명은 평등하지 않은 것이냐'고 반문하게 된다. 궤변처럼 들리지만 선이든 위선이든 '그럴듯함'을 입고 있는 사람이라면 반박하기 쉽지 않다. '그럴듯한' 사회에서는 무조건 '생명은 평등하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폭탄〉

영화 〈폭탄〉


결국 백기 투항한 키요미야에 이어 타고사쿠를 상대하는 건 루이케다. 두 동료의 실패를 본 루이케는 처음부터 타고사쿠와의 레벨을 맞춘다.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었냐"는 물음에 "당연한 소리를 한다"며 황당한 얼굴을 하는 루이케는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던 타고사쿠의 진짜 욕망을 끌어내기 시작한다. 타고사쿠는 '왜 나처럼 욕망을 발가벗기지 않느냐'는 식의 떼를 쓰지만 루이케는 '수지타산이 안 맞아서 참는다'는 논리로 맞선다. 사회에서의 위선이 의미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타고사쿠의 주장을 서서히 깎아낸다. 눈높이를 조절하고 나서야 타고사쿠를 반박할 근거가 생긴다. 결국 '위선'도 '선'이라는 것. 그럼에도 '위선'을 '악'이라 말하는 폭탄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터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폭탄〉의 장단점은 분명하다. 이미 현지를 한 차례 휩쓴 사토 지로의 타고사쿠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소외된 어른의 비틀린 논리가 마치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탁월한 연기다. 현실과 전혀 관계 없는 듯한 선문답으로 끝내 모두의 위선 뒤 욕망을 노출시키는 심리전은 심장을 조이는 긴장감을 조성한다. 다만 곳곳에 눈치 없이 끼어드는 일본 영화 특유의 교훈성 설정이나 감동 코드들은 서스펜스를 느슨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18일 개봉.


관련기사

Copyright ⓒ 엘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광고 보고 계속 읽기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