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홍연택 기자
9일 업계에 따르면 이날 오전 7시 26분 기준 4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은 전장대비 14.85% 오른 배럴당 107.54달러로 집계됐다. WTI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선 것은 지난 2022년 7월 이후 약 4년 만이다.
이처럼 유가의 가파른 상승세는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정학적 리스크 탓이 크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지난달 28일 이란에 대한 합동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이를 시작으로 중동 지역을 둘러싼 긴장감은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전 세계 해상 원유 수송량의 20%, 해상 교역량의 약 27%를 담당하는 호르무즈 해협마저 사실상 봉쇄됐다.
미국과 이란이 점점 공세 수위를 높이면서 장기화될 조짐도 보인다. 시장에서는 이로 인해 유가 상승세가 지속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산업계도 이에 긴장하고 있다. 당장 제품을 만드는 기초소재에도 타격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다.
반도체 업계에도 적잖은 영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헬륨, 브롬 등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산업용 가스와 화학 소재 수급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에 수입되는 헬륨 65% 가량이 카타르산이다. 같은 기간 브롬은 97.5%가 이스라엘에서 들어온다. 중동 지역의 긴장감이 반도체 산업에도 퍼질 수 있는 배경이다.
업계에서는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기초소재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있어 당장의 영향은 크지 않다고 보지만 장기화될 경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국제유가가 오를 경우 물류비, 전기요금 등 전반에 걸쳐 비용 상승 압박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헬륨, 브롬 등 중동 의존도가 적지 않지만 대체할 수 있는 공급망들이 있어 당장 생산에 차질을 빚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다만 국제 유가가 오르면 전 산업이 마찬가지이겠지만 원가 상승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사태가 장기화될 수 있는 만큼 반도체 등 산업 공급망 전반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유가가 올라가면 반도체 뿐만 아니라 전 산업이 다 영향을 받게 된다"며 "반도체는 그중에서도 전력소모가 많다보니 기업 입장에서는 전기값에 대한 부담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에서도 반도체 생태계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석유화학 업계에는 보다 직격탄이 예상된다. 국내 석화사들은 중동을 통해 원유와 나프타(납사)를 공급받고 있는데,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운송 통로가 막히면서 생산 차질이 본격화됐다. 업계에서는 최악의 경우 공장 가동이 중단되는 '셧다운'까지 예상하는 분위기다.
문제는 국내 석유화학 산업 구조 자체가 중동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석화사들은 통상 정유사에서 생산되는 나프타와 해외에서 수입되는 나프타를 함께 사용한다. 이 가운데 상당 물량이 중동에서 들어오는데, 최근 중동 지역 정세가 악화되면서 원유와 나프타 운송의 핵심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자 공급망 전반에 차질이 발생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핵심 원료인 나프타 가격도 상승하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나프타의 3분의 2를 중동에서 수입해오고 있는데, 나프타 가격은 지난달 27일 톤(t)당 590달러에서 이달 3일 t당 737달러로 약 25% 상승했다.
원료 수급 불안이 현실화된 첫 사례도 나왔다. 여천NCC는 급기야 지난 4일 공급 불가항력을 선언했다. 회사는 고객사들에게 서한을 보내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인해 3월 인도 예정이었던 원료 나프타의 도착이 크게 지연됐다"고 말했다. 불가항력 선언은 천재지변이나 전쟁 등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계약 이행이 어려울 때 발동하는 조치다.
단순히 원가 부담이 커지는 수준을 넘어 공장 가동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란 우려도 속속 제기되고 있다. 석유화학 공정은 나프타를 원료로 에틸렌 등 기초유분을 생산하는 구조인데, 원료 공급이 끊기면 라인을 정상적으로 돌리기 어렵다. 현재 기업들은 남아있는 재고를 활용해 버티고 있지만, 재고가 소진될 경우 가동률을 낮추거나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유가가 오르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원료 자체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는 "원료가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면 대부분의 기업들이 모두 가동률을 조절하다가 결국에는 불가항력을 선언할 수밖에 없다"며 "기업들 모두 한두 달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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