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콜드 미트〉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인간은 한없이 선해질 수도 있고, 한없이 악해질 수도 있다'는 말은 너무 당연해서 지루하게 들린다. 가령 의도된 선은 누군가에게 악으로 작용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상가들은 인간이 선과 악 둘 중 하나를 타고났다든가, 욕구만 가진 채 태어나 선악을 학습한다는 설들을 내놨다. 여기서 전제돼야 하는 건 선과 악을 나누는 잣대가 무엇인지다. 문명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어느 정도 국경과 문화를 초월한 합의로서의 규범을 발명했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짓는 '인간다움'을 지키는 게 선이며, 이는 동족을 잡아먹지 않는다는 걸 기본으로 한다. 〈콜드 미트〉는 '인간다움'이라는 기준으로 했을 때, 오로지 악하기만 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시작한다.
영화 〈콜드 미트〉
최저온도가 영하 45도까지 곤두박질치는 외곽 고속도로. 한 남자가 눈보라가 거세지며 인적마저 드물어진 이곳에서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추위를 녹이려 들른 패밀리 레스토랑에는 손님도 떠나고, 직원도 퇴근했다. 남은 것은 여자 주인과 남자 뿐. 그런데 그때 술에 취한 여자의 남편이 나타나 행패를 부린다. 입씨름 끝에 남편의 손이 올라가려는 찰나,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남자가 끼어든다. 주정뱅이가 얌전히 물러날 리 없다. 잭나이프까지 꺼내든 남편 앞에서 남자는 차분히 안경을 벗으며 경고한다. 단순히 기가 센 것이 아니라 제정신이 아닌 듯한(?) 남자의 눈에 주정뱅이 남편은 후퇴하고, 소동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제서야 자리에 앉은 레스토랑 주인 애나(나나 버그만)와 이방인 데이비드(앨렌 리치)는 통성명을 한다.
레스토랑을 나온 데이비드가 목적지를 찾아 고속도로에서 숲길로 접어든 순간, 주정뱅이 남편이 그를 알아보고 위협 운전을 시작한다. 미끄러운 눈길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눈보라 속에서 속도를 내던 데이비드는 외진 곳으로 숨어 시동을 끄고 주정뱅이가 사라지길 기다린다. 결국 추적은 피했지만, 차 바퀴가 눈에 파묻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눈보라가 차를 뒤덮으며, 데이비드는 핸드폰 전파마저 잡히지 않는 상황에 완전히 고립된다. 차에서 눈을 붙인 데이비드는 우선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에 인적이 있으리라 믿고 그리로 향하려 한다. 차 밖으로 나선 그는 트렁크로 향한다. 열린 트렁크 안에는 결박당한 애나가 있었다.
영화 〈콜드 미트〉
반갑지 않은 반전 속에서 데이비드와 애나는 각자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한다. 데이비드는 연기 쪽으로 가던 길에 발을 헛디뎌 다리가 부러지며 기어서 차로 돌아온다. 온 힘을 다해 결박을 풀고 트렁크에서 빠져나온 애나는 혹한과 눈보라에 다시 차로 발걸음을 돌린다. 먼저 차에 도착한 애나는 데이비드의 마취약으로 그를 기절시키고 움직일 수 없도록 묶는다. 둘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데이비드는 여유롭다. 애나를 납치하려던 계획이 오래된 것이었다며 오히려 정신 공격을 가한다. 남자는 뼈가 드러날 정도의 골절상을 입었고 테이프로 목과 손을 묶였지만 주도권이 마치 자신에게 있다는 듯 군다. 한 평도 안되는 좁은 차 안에서 두 남녀는 남자가 신체적 페널티를 입은 후에야 겨우 평등해진 것처럼 보인다.
극한상황에서도 거짓으로 자신을 가리려는 데이비드에게 애나는 끊임없이 진실을 추궁한다. 그러다가 데이비드의 진짜 비밀을 알게 된 애나. 거기엔 때와 장소를 잘못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남자에게 짓밟힌 여자들이 있었다. 남자가 만든 폭력의 지옥 속에서 여자들은 특징도, 개성도 없이 납작해진다. 애나는 추위와 부상으로 만신창이가 된 데이비드에게 지옥에서의 절규를 퍼붓는다. 그건 주정뱅이 남편에게, 또는 10대 때부터 자신을 삐뚤어지게 한 남자들에게 지르지 못한 고함일지도 모른다.
영화 〈콜드 미트〉
이 처절한 외침이 공허하게 들리는 건 데이비드에게 여전히 여자들의 사정은 아무런 관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설원 지옥에서조차 인간과 인간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로 존재하는 두 사람을 극한으로 내몰며 매우 익숙한 불평등의 부조리들을 폭로한다. 평등하지 못한 관계에서 악은 더욱 악해지고, 강해진다. 설원 지옥에서 칼을 쥐고도 끝내 데이비드를 죽이지 못한 애나와 반대로 데이비드는 손발이 묶인 채로도 마지막까지 애나를 죽이려 한다. 애나와 데이비드가 탄 차가 눈보라에 파묻힐 수록, 그 현실은 더 또렷이 드러나고 추위는 선악의 심판자로 가시화했다. 11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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