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이 메모리 반도체로까지 확산하면서 글로벌 공급망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규제 강화 움직임 속에서 엔비디아는 중국 수출용 칩 생산을 중단하고 차세대 AI 칩 생산으로 전략을 전환했다.
8일 업계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TSMC의 생산 설비를 기존 H200 칩에서 차세대 ‘베라 루빈’ 칩 생산으로 전환했다. 미국과 중국 양국의 규제 불확실성이 커지자, 수요가 확실한 차세대 제품으로 생산 전략을 바꾼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엔비디아의 H200 칩에 대해 중국 수출을 허용하는 방침을 밝혔지만, 미국 상무부는 고객확인제도(KYC) 적용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엔비디아는 해당 조건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중국 정부 역시 자국 기업에 대해 필요한 경우에만 H200을 구매하도록 지침을 내리고 중국산 AI 칩 사용을 장려하는 등 규제 환경이 복잡해졌다. 엔비디아는 수요가 이미 확보된 차세대 AI 칩 ‘베라 루빈’ 생산에 집중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FT는 오픈AI와 구글 등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해당 칩에 대한 수요를 이미 확보했다고 전했다.
이와 동시에 미국 정부는 중국의 AI 기술 발전을 억제하기 위해 메모리 반도체까지 규제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블룸버그와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는 HBM2와 HBM3, 최신 규격인 HBM3E까지 포함한 고대역폭메모리(HBM)의 대중국 수출을 전면 제한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미국은 자국 기술이 일부라도 포함된 제품에 대해 제3국 생산품까지 규제할 수 있는 ‘해외직접제품규칙(FDPR)’을 근거로 수출 통제를 확대하고 있다. 이번 조치는 중국 기업들이 미국 규제를 피해 자체적으로 AI 칩을 생산하거나 우회 수입하는 경로를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업계에서는 미국이 AI 연산 능력의 핵심인 HBM 공급을 차단함으로써 중국의 AI 경쟁력을 구조적으로 약화시키려는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 상무부 관계자는 “국가 안보를 위해 첨단 반도체 기술이 경쟁국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규제 확대는 글로벌 HBM 시장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는 한국 반도체 기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미국산 장비와 설계 자산(IP)을 사용하는 구조상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규제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HBM은 일반 D램보다 가격이 높은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최근 한국 반도체 수출 회복을 이끄는 핵심 품목이다. 만약 중국 수출이 제한될 경우 중국 매출 감소로 실적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반도체 장비 업계에서는 HBM 생산에 필요한 노광·식각 장비의 대중국 반출까지 제한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시장 분석가들은 이번 조치가 현실화될 경우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분절화를 가속화하고 기업들의 투자 불확실성을 키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 기업들이 최대 시장 중 하나인 중국과 핵심 기술 동맹인 미국 사이에서 전략적 선택을 요구받는 상황에 놓이고 있다”며 “향후 규제 세부 내용에 따라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구조 자체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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