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포커스] 대를 이어 한국에 묻힌 푸른 눈의 선교사 '헨리 닷지 아펜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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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포커스] 대를 이어 한국에 묻힌 푸른 눈의 선교사 '헨리 닷지 아펜젤러'

뉴스컬처 2026-03-07 12:20:3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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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여러 장면을 조용히 품고 있는 묘비들이 서 있다. 그 가운데에는 한 미국인 가문의 이름이 두 세대에 걸쳐 새겨져 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기관을 세운 선교사와, 그의 뜻을 이어 한국의 격동기를 함께 살아낸 아들의 이름이다. 3·1절 107주년을 맞은 올해, 아들 헨리 닷지 아펜젤러의 삶이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을 계기로 다시 역사 속에서 호명되고 있다.

헨리 닷지 아펜젤러. 사진=국가보훈부
헨리 닷지 아펜젤러. 사진=국가보훈부

지난 1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제107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배재학당 제5대 교장을 지낸 헨리 닷지 아펜젤러(Henry Dodge Appenzeller, 1889~1953)가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훈장은 고인의 증손녀 로라 아펜젤러가 대신 수여받았다. 올해 수훈자 가운데 그는 유일한 미국 출신 인물로, 국적을 넘어 한국의 역사에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헨리 닷지 아펜젤러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가문이 한국과 맺은 인연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버지인 선교사 아펜젤러는 19세기 말 조선에 들어와 배재학당을 설립하며 근대교육의 문을 열었던 인물이다. 당시 조선 사회에 서구식 교육과 기독교 사상을 전하며 새로운 지식의 기반을 만들었다.

아버지의 활동은 선교를 넘어 교육과 사회개혁의 영역까지 확장됐다. 배재학당은 이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활동, 다양한 사회운동의 인재를 길러내는 공간으로 자리 잡으며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헨리 닷지 아펜젤러_사진=국가보훈부
헨리 닷지 아펜젤러_사진=국가보훈부

1889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난 아들 헨리 닷지 아펜젤러는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외국인 선교사의 자녀였지만 성장 환경은 이미 한국 사회와 깊이 맞닿아 있었다. 어린 시절 경험한 한국의 풍경과 사람들은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남겼다.

하지만 헨리 닷지 아펜젤러의 삶은 어린 나이에 커다란 상실을 겪으며 방향이 바뀌게 된다. 아버지가 선박 사고로 순직했다는 소식은 어린 아들에게 깊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 비극적인 사건은 훗날 아버지의 길을 이어 한국 선교와 교육의 길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성인이 된 헨리 닷지 아펜젤러는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과 신학 교육을 이어갔다. 그러나 삶의 무대는 결국 다시 한국으로 향하게 된다. 1917년 선교사로 한국에 돌아오며 아버지의 사역을 잇는 또 하나의 여정을 시작한다.

당시 일제 치하 조선 사회는 거대한 격동을 맞고 있던 시기였다. 식민지 통치 아래에서 민족의 정체성과 미래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고, 사회 곳곳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1920년 헨리 닷지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제5대 교장으로 취임하며 교육 현장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의 교육 철학은 학문적 성취에만 머물지 않았다. 신앙을 기반으로 한 인격 교육과 함께 학생들에게 민족적 자각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다.

배재학당은 자연스럽게 시대적 흐름 속에서 민족 의식이 활발히 형성되는 공간이 됐다. 학생들은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만세 시위를 벌이며 식민지 현실에 대한 목소리를 드러냈다.

일제 당국은 이를 문제 삼아 학교 측에 강력한 징계를 요구했다. 하지만 헨리 닷지 아펜젤러는 학생들을 처벌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육자로서 학생들의 양심과 신념을 억압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 교장 인가를 취소당하는 불이익을 겪는다. 그러나 이 사건은 배재학당이 민족교육의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학교는 이후에도 민족의식과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교육 전통을 이어가게 된다.

헨리 닷지 아펜젤러가 길러낸 학생들 가운데는 훗날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의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배재학당 출신들이 6·10 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 등 여러 역사적 사건에서 활약했다는 사실은 그의 교육이 남긴 영향력을 보여준다.

1940년 일제는 결국 그를 조선에서 강제로 추방한다. 하지만 한국을 향한 활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미국과 하와이를 오가며 한국 독립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이어갔다. 해외 한인 사회와 협력하며 독립운동 지원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당시 연설과 활동 내용은 미국과 하와이의 언론에도 소개되며 한국 독립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1945년 광복 이후 헨리 닷지 아펜젤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군정 시기 특별 고문으로 활동하며 한국 사회의 안정과 민주적 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그에게 한국은 선교지나 임시 거주지가 아닌 삶의 중심이 된 공간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현장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전쟁고아와 피난민을 위한 구호 활동에 집중하며 교회와 국제 기독교 단체를 통해 지원을 조직했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인간을 돕는 일에 마지막까지 힘을 쏟았다. 그러나 과중한 활동과 피로는 결국 건강을 악화시켰고, 1953년 생을 마감하게 된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헨리 닷지, 어머니 엘라 닷지, 엘리스 레베카, 아이다 하나, 메리 엘리. 사진=배재학당역사박물관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헨리 닷지, 어머니 엘라 닷지, 엘리스 레베카, 아이다 하나, 메리 엘리. 사진=배재학당역사박물관

헨리 닷지 아펜젤러의 마지막 유언은 짧지만 강렬했다. 자신의 유해를 사랑하는 한국 땅에 묻어 달라고. 그 뜻에 따라 그의 묘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에 자리 잡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묘역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은 한국 근현대사의 특별한 장면을 보여준다. 외국에서 온 선교사 가문이 한 나라의 역사와 깊이 연결되며 두 세대에 걸쳐 영향을 남긴 사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교계와 교육계에서는 헨리 닷지 아펜젤러의 삶과 정신을 다시 돌아보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는 기념 예배와 다양한 행사를 통해 그의 신앙과 교육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증손녀 로라 아펜젤러 역시 기념식에서 신앙의 의미를 강조하며 교회가 현대 사회 속에서 공동체와 나눔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조의 삶이 오늘날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헨리 닷지 아펜젤러의 삶은 한 선교사의 개인적 이야기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교육자였고, 한국 독립을 지지했던 국제적 연대의 인물이었으며, 전쟁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했던 사회 활동가였다.

무엇보다 헨리 닷지 아펜젤러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 묻히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한 나라의 역사 속으로 들어와 운명을 함께했던 삶은 지금도 한국 근현대사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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