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서구의 페르시아 공포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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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로] 서구의 페르시아 공포증

연합뉴스 2026-03-06 06:55:0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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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이란 강경책엔 고대 위협이 각인한 '트라우마' 작용할지도

영화 '300'에서 드러난 서구인의 '집단무의식'과 타자화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2006년 할리우드 개봉작 '300'은 기원전 거대 제국 페르시아의 대대적 침공에 목숨 걸고 항전하던 스파르타 전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많은 예산을 투입하지 않고도 세계적 흥행을 거뒀지만, 당시 이란에서는 국민적 분노와 반발이 일었다. 이란 정부와 의회는 성명 등을 통해 상영 중단을 촉구했고, 유네스코에 공식 항의서한까지 보냈다. 일반인들까지 서명 운동과 온라인 여론 조성에 나설 정도였다.

영화 '300' 포스터 영화 '300' 포스터

[출처: 워너브로스 홈페이지. 재배포 DB 금지]

왜 그랬을까. 단순하게 말하면 이란이 바로 과거 세계를 주름잡던 페르시아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300'은 실제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으나 묘사된 내용은 편견과 과장이 많았다. 당시 페르시아 왕인 크세르크세스 1세를 거인이자 악의 화신처럼 그렸고, 페르시아 병사들은 괴물이나 야만인들로 묘사됐다. 신화 속 괴수 같은 동물들도 등장한다. 반대로 스파르타 정예군 300명은 선하고 강인한 의지를 지닌 인간 승리의 상징으로 설정됐다.

이란 측은 당시 이 영화가 "이란인을 야만인과 마귀로 묘사하는 역사 조작을 통해 반(反)이란 정서를 심으려는 미국의 심리전이자 정치 공작"이라고 비난했다. 실제 심리전이거나 소프트파워 전술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을 위시한 서구 사회가 페르시아에 대한 '근원적 공포'를 지녔고, 오랫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부활을 경계해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미국이 중동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이란이며, 그래서 미국과 유럽은 잠자던 '거인 유전자'가 깨어나지 않게 이란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압박해왔다.

지금 미국이 이란을 공격하는 배경도 이처럼 문화인류학적 측면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역사, 국제정치, 정신분석학, 진화심리학 등을 망라한 통섭적 접근이다. 이란이 핵무기를 갖는 건 북한의 핵 보유와는 차원이 다르다. 유라시아 허브로 아시아, 중동, 유럽을 잇는 지정학적 위치, 영토와 인구, 역내 영향력, 국민 역량 등을 고려할 때 핵만 갖는다면 중국마저 제치고 미국 패권에 도전할 수도 있는 잠재력을 지녀서다. 이런 경계심은 서구인의 DNA에 각인된 근원적 트라우마로 인해 더 극대화된다. 영화에서 페르시아가 압도적으로 강하지만 기괴하게 묘사된 건 이런 서구인의 심리 기저를 투영한다.

브리핑하는 헤그세스 미국 국방장관과 댄 케인 합참의장 브리핑하는 헤그세스 미국 국방장관과 댄 케인 합참의장

[AP=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런 통찰은 실제 학계에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타자화, 문명 충돌이란 개념으로 다뤄온 주제다. 서구 역사 서술의 시초인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를 '자유로운 민주 그리스'에 대비되는 '거대 야만 제국'으로 묘사했다. 이를 통해 '우리'(West)'와 '그들'(East)이라는 타자화에 바탕을 둔 이분법 역사관이 탄생했고, 문명 충돌 프레임으로 이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서구인 시각에서 그리스와 로마는 문명의 원류이고, 페르시아는 신비스러우나 이질적인 동양(Orient)을 상징한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페르시아군이 '불사의 괴물'로 묘사된 건 헤로도토스의 펜 끝에서 시작된 공포 기반 역사관이 2천500년 지난 지금도 서구인의 무의식에 깊이 박혀있음을 보여준다.

고대 로마·그리스의 현신처럼 여겨지는 미국이 이란 공격 명분으로 국제사회의 '자유로운 민주 질서를 파괴하는 악의 축 제거'라는 프레임을 내세우는 건 그 옛날 '자유민주 연합 그리스 vs 야만 전제국가 페르시아'라는 구도 설정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성적인 서구 사회와 대화·협상이 불가능한 비이성적 집단이라는 프레임을 이란에 씌운다는 비판도 없지는 않다. 미국과 유럽의 대(對)이란 정책에는 안보적 고려 외에도 수천 년 축적된 '동양의 위협'에 대한 '집단 무의식'이 본능적으로 반영되는 것일 수 있다. '악의 축'이라는 과격하고 감정적이며, 종교적이기까지 한 용어가 사용되는 것도 같은 맥락일 듯하다.

물기둥에 선체가 찢어지는 이란 호위함 물기둥에 선체가 찢어지는 이란 호위함

[UPI 연합뉴스. 재판매 및 DB 금지]

서구 문명을 완전히 멸망시킬 만큼 실존적이고 상징적인 위협이었던 세력으로 인류 역사상 두 제국이 꼽힌다. 페르시아와 옛 몽골이다. 지금 몽골은 세력이 미약해져 위협이 되지 못하지만, 페르시아 후신은 여전히 '제국의 부활'을 꿈꿀 잠재력을 잃지 않았다. 외교 거물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생존 유지에 장애물을 '유라시아 통합'으로 봤는데, 지정학적으로 이를 이룰 만한 후보가 유라시아 심장부에 위치한 이란 정도다. 인류사적으로 볼 때 미국과 이란의 대결은 현대 패권국과 쇠락한 고대 패권국의 생존을 건 싸움이자 동서양 문명이 충돌하는 숙명의 일전인 셈이다.

영화 '300'에선 동양의 페르시아가 절대 강자였고, 서구를 상징하는 그리스의 도시국가 스파르타는 약체였다. 하지만 현재진행 중인 미국과 이란의 무력 대결에선 그 위치가 역전됐다. 절대 강자 미국이 최소 한 달 이상 공격을 예고하고 가공할 화력을 쏟아붓는 가운데 약자로 전락한 페르시아 후예는 영화 속 스파르타 전사들처럼 결사 항전을 맹세하고 있다. 역사는 돌고 돈다.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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