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황학동 주방거리 상권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주방거리 곳곳엔 폐업 점포에서 수거된 중고 기기들이 쌓여 있고 이를 매입할 예비 창업자의 발길이 끊기면서 과거 '업소용 주방용품 성지'로 불렸던 명성은 옛말이 됐다. 불황의 여파로 식당 창업이 급감한 데다 당근, 알리익스프레스 등 온라인 중고 거래와 해외 직구 플랫폼 확산이 맞물린 결과로 풀이된다.
신당역 상권과 맞닿아 있는 황학동 주방거리는 진입로부터 점포 지붕 높이까지 층층이 쌓인 업소용 냉장고와 각종 집기들이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다. 기자가 거리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실제 견적 상담을 진행하는 방문객은 단 한 팀에 불과했다. 상인들 역시 적극적으로 호객 행위를 하기보다는 드문드문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볼 뿐 전반적으로 적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상권의 침체는 매출 지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서울시 상권분석서비스에 따르면 '황학동 주방가구거리상점가' 소매업의 지난해 3분기 월평균 매출액은 974만원으로 서울시 평균 1834만원의 절반 수준에 머물렀다. 매출 건수 감소는 더욱 두드러진다. 지난해 3분기 월평균 매출 건수는 105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60건이나 줄었다. 소비자들의 발길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상점가 전체의 매출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오프라인 상권 침체의 배경에는 외식업을 중심으로 한 자영업 생태계의 구조적 변화가 지목된다. 식당 폐업이 늘어나면서 처분된 중고 주방 집기들이 황학동으로 대량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세청 국세통계포털에 따르면 2024년 자영업자 폐업 수는 사상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어섰다. 이 가운데 소매업과 음식점업이 전체 폐업의 약 45%를 차지했다.
반면 폐업 물량을 흡수해야 할 신규 창업은 급감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발표한 '2025년 연간 창업기업동향'에 따르면 음식점 및 주점업 창업은 전년 대비 14.2% 감소했다. 취재 당일 중고 집기를 가득 실은 트럭을 정리하던 한 상인은 "식당들이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중고 기기들은 계속 밀려 들어오는데 정작 사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싸게 매입해도 팔리지 않아 창고에 쌓아둘 수밖에 없어 이제는 매입 자체가 부담스럽다"고 토로했다.
온라인 중고 거래 플랫폼의 확산은 황학동 주방거리의 쇠락을 부추긴 결정적인 요인으로 지목된다. 자영업자 간 직거래가 활성화되면서 예비 창업자들이 굳이 오프라인 상권을 거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신규 창업 시 황학동 점포를 일일이 방문하며 집기를 구입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당근'과 같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폐업을 앞둔 식당에서 냉장고나 오븐 등 대형 주방기기를 직접 구매하는 방식이 확산되고 있다. 초기 투자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예비 창업자와 처분 비용을 줄이려는 폐업자의 이해관계가 온라인에서 맞물리면서 황학동 상인들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는 셈이다.
중국계 이커머스 플랫폼을 통한 저가 신제품 유입도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예비 창업자들이 알리익스프레스 등 해외 직구 플랫폼을 통해 소형 주방 가전이나 식기류를 저렴하게 대량 구매하면서 중고품을 세척하고 수리해 재판매하던 황학동 상인들의 가격 경쟁력이 약화됐다.
황학동 주방거리에서 3대째 가업을 이어온 상인 김모씨는 "부모님과 함께 30년 넘게 점포를 운영해 왔지만 최근 들어 폐업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며 "중국 직구 제품과 온라인 중고 거래가 보편화되면서 현장을 직접 찾는 손님들이 거의 사라졌다"고 말했다.
관할 지자체인 중구청은 상권 활성화를 위한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는 입장이다. 중구청 관계자는 "시설 현대화 사업을 통해 노후 시설을 정비하고 시장 환경을 개선해 방문객들이 보다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며 "행사와 축제 지원, 상인 대상 AI·디지털 교육 등을 통해 상인들의 홍보와 판매 역량을 높이고 시장 경쟁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황학동 주방거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상권 구조 자체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기존처럼 자영업자만을 주요 고객으로 삼는 구조에서 벗어나 일반 소비자를 적극적으로 유입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자영업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상권 구조는 한계가 있다"며 "요리나 식기, 주방 문화에 관심이 있는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체험 행사나 이벤트를 진행해 거리의 인지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단순한 중고 집기 거래 공간을 넘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는 복합 소비 공간으로 변화해야 상권이 다시 활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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