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임신 36주차에 임신중절 수술을 받아 태아를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된 20대 산모가 1심에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가운데 시민단체와 국제 인권단체가 임신중지 관련 법·제도 정비를 촉구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부장판사 이진관)는 4일 살인 등 혐의로 기소된 산모 권모(26)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고 200시간의 사회봉사를 명령했다. 함께 기소된 병원장 윤모(80)씨에게는 징역 6년과 벌금 150만원, 수술을 집도한 의사 심모(62)씨에게는 징역 4년을 선고했다. 환자 알선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브로커 2명은 각각 징역 1년과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권씨가 의료진과 공모해 태아를 숨지게 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태아가 모체 밖으로 나오면 생존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의료진이 어떤 방식으로든 태아를 사망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용인했다”며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이어 “권씨는 임신 36주차로 곧 자연 분만이 가능한 상태였고 태아 역시 특별한 이상 없이 생존 가능성이 있었다”며 “다른 병원에서 임신 주수 때문에 중절 수술이 어렵다는 설명을 들었음에도 수술이 가능한 의료기관을 찾아 수술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낙태죄가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입법 공백 상태인 점도 언급했다. 재판부는 “낙태죄는 태아를 모체 밖으로 배출하거나 모체 안에서 사망하게 할 때 성립하지만 태아가 살아 있는 상태로 모체 밖에 나오면 하나의 생명으로 보호된다”며 “이 경우 낙태죄와는 별개로 살인죄 성립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재판부는 “낙태죄 입법 공백이 범죄 성립 여부를 좌우하지는 않지만 양형에서 참작할 여지는 있다”며 “산모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고려할 때 임신과 출산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며 태어난 순간부터 헌법상 생명권의 주체가 된다”며 “피해자는 태어나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건은 권씨가 자신의 임신중절 경험을 담은 영상을 유튜브에 게시하면서 알려졌다. 검찰에 따르면 윤씨와 심씨는 2024년 6월 임신 34~36주차였던 권씨에게 제왕절개 수술을 실시한 뒤 태아를 숨지게 하고 사산으로 위장했으며 진료기록과 사산증명서를 허위 작성한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결심공판에서 병원장 윤씨에게 징역 10년과 벌금 500만원, 추징금 11억5000여원을 구형했고 권씨와 심씨에게는 각각 징역 6년을 구형했다.
선고를 앞두고 시민단체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는 서울중앙지법에 권씨의 무죄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 탄원서에는 127개 시민단체와 시민 4792명이 연명했다. 단체 측은 지난달 23일부터 25일까지 진행된 서명에 약 4800명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국제 인권단체도 이번 판결을 계기로 제도 정비 필요성을 제기했다.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 지역사무소 사라 브룩스 부국장은 “임신중지는 국제인권 기준에 따라 보장돼야 할 필수 의료서비스이자 기본적 인권”이라며 “이번 판결은 임신중지 권리를 둘러싼 법·제도적 공백 속에서 여성과 의료진이 처한 위험한 현실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그는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국회가 모자보건법 개정 등 후속 입법을 이행하지 않으면서 임신한 여성들의 필수 의료서비스 접근이 제한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며 “명확한 규제와 보호 체계가 마련되지 않으면 여성과 의료진이 비공식 의료 체계로 내몰리거나 의료서비스 접근이 차단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한국 정부에 모자보건법 개정과 성·재생산 건강 및 권리 보장을 위한 제도 정비를 촉구했다.
한편 헌법재판소는 2019년 형법상 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고 2020년 말까지 관련 법을 개정하도록 요구했지만 국회가 기한 내 입법을 마치지 못해 해당 조항은 효력을 상실했다. 현재까지 임신중지 관련 규제와 보호 체계가 명확히 마련되지 않아 제도적 공백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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