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올림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지키기 위해 활동하는 시민단체입니다.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산재를 신청하면서 기록의 필요성을 절감해 생애사 기록을 시작했습니다. 아픔과 고통뿐 아니라 개인의 꿈과 행복에 대해 묻는 인터뷰를 했고, 재해경위서, 진술서가 아닌 삶을 담은 글을 적었습니다. 올 한 해 2월부터 한 명씩 총 11명의 삶을 구술기록으로 전해드립니다.
내가 이번에 가스를 예를 들어 들이마셨다. 이게 내 몸에 언제 반응이 올지 시한폭탄 같은 거예요, 어떻게 보면. 그리고 진짜 안 좋아요. 우리가 가스 라인을 풀 일이 있어요. 퍼지(Purge, 배관 내부의 가연성 가스를 제거해 폭발 위험을 방지하는 기술)를 하라고 막 이렇게 하는데 퍼지가 안 될 수가 있어요. 실질적으로 펌프로 최대한 뽑아내더라도 정체돼 있는 거는 계속 정체돼 있거든요. (손을 돌리며) 근데 이렇게 풀어요. 풀다 보면 냄새가 확 나잖아요. 냄새를 딱 '맞으면' 고개가 뒤로 확 제껴져요. 확 이런 식으로. 한동안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그러면 '내 몸에 또 나중에 문제가 생기겠구나. 문제가 안 생기면 다행인데 문제가 생길 것 같다.'
냄새를 '맞다'는 표현은 어색하다. 그러나 맡는 순간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 냄새는 분명 나를 때리는 것에 다름 아닌 충격일 것이다. 윤성원님은 자신이 하는 작업, 회사의 문제, 작업환경의 위험성에 대해 자신만의 언어로 유려하게 설명하는 사람이었다. 인터뷰이를 구하는 데 난항을 겪던 중 선뜻 응해주시겠다는 응답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보다 짧고 가벼운 전화 인터뷰라 생각하셨던 것 같지만 최대한 부담스럽지 않게 취지를 잘 설명드렸다. 설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이라 어렵게 기차표를 구해 청주로 갔다. 활동 중에 대면할 기회가 없었고 인터뷰를 위한 연락을 했을 때는 조금은 딱딱한 분이 아닐까 우려했지만 막상 만나보니 편했고 대화가 잘 이어졌다. 내가 편안하게 느낄 나이, 성별, 직업의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그러했다. 성원님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결이 나와 맞는 사람이었다.
거리를 채운 매연과 투쟁하는 노동자들
윤성원의 아버지는 울산에서 조선산업에 종사하다 윤성원이 6살 때 돌아가셨다. 현대중공업 바로 앞에 살던 1982년생 성원의 눈에 들어온 동네 풍경은 여느 동네와 사뭇 달랐다. 투쟁하고 데모하는 노동자들은 그에게 익숙하고 권태로운 동네 풍경 중 하나였다.
환경은 매연 가스 많이 나오고, 그다음에 뭐 오토바이로 거의 출퇴근하시는 분들이 거의 한 90%. 바닷가라가지고 그나마 숨쉬기는 괜찮았어요. 근데 공업 도시라 그때는 매연 많았죠. 차도 가야 되는데 오토바이가, 베트남 가시면 꽉 차 있잖아요 길가에. 그때 그랬어요. 오토바이가 줄 서 가지고. 만날 데모하고 막 대문에 최루탄 던지고.
울산은 노동운동의 역사가 깊은 곳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울산에서 현대중공업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1990년대 초에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파업'이 있었다. 노동자들은 임금 협상을 요구하고, 경영 성과에 대한 분배를 요구하는 성과급 분배 투쟁을 벌이기도 했고,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투쟁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97년 IMF 금융 위기에는 현대자동차의 대규모 정리 해고에 대한 저항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참고자료 바로가기 : 울산문화역사대전 '노동운동')
성원의 어머니는 혼자 자식 둘을 키우느라 목욕탕 청소 일을 했고, 성원은 초등학생 때부터 어머니가 혼자 다 할 수 없는 목욕탕 청소와 우유 배달 일을 함께했다.
새벽에 우유 배달하고 그다음에 목욕탕 청소하고 그러니까 일찍 일어났어요. 한 5시쯤에 일어나가지고 1시간 정도 배달하고 목욕탕 가가지고 청소하고. 학교는 뒷전이죠.
돌아보면 성원이 살아온 삶의 결과 매우 다르지만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중학교 때쯤에 시를 썼는데 시를 쓰라고 해가지고. 근데 그냥 장난 삼아 시를 썼는데 입상이 돼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 문체부 선생님이 학교에 클럽이 있는데 거기 들어오라고 그래가지고 강제적으로 거기 가서 했었는데, 하다 보니까 또 미술에 소질이 있다 해가지고. 담임 선생님이 미술 선생님이었어요. "미술도 해보지 않겠냐." "저는 돈을 빨리 벌고 싶습니다." 선생님도 원래는 인문계 가가지고 대학을 가라 이렇게 하셨는데 그보다는 이제 "저는 돈을 빨리 벌고 싶습니다. 공업 고등학교 가겠습니다." 공고부터 갔죠.
미술과 시 쓰기에 소질이 있다 했지만 정작 성원은 해야 해서 했을 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예술적 소양은 취미로도 남지 않았다. 당시 성원에게 유일한 관심사이자 꿈은 경제적 독립이었다. 성원은 빠른 취업만 생각하며 고민 없이 공업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학교에서 거의 살았죠
공고에서는 '기능 올림픽'이라 부르는 기능경기대회를 준비하는 기능부를 뽑았다. 기능경기대회는 숙련기술 개발 및 기능 수준의 향상을 도모하는 목적으로 1966년에 시작되어 매년 지역대회, 전국대회가 열린다. 성원은 개인적인 성취 욕심보다는 역시 돈을 생각하며 기능부에 들어갔다.
집에 부담을 주지 말자. 학교에서 기능 올림픽 선수만 하면 육성회비라든지 비용은 일절 나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집에도 잘 안 가도 된다. 어차피 거기서 있으면 뭐 먹을 것도 주거든요. 라면 같은 거. 그다음에 잠 잘 수도 있어요. 책상 다 치워버리고 그 위에 올라가가지고 잠 자고. 집에는 거의 한 달에 한두 번 (가고). 학교에서 거의 살았죠. 빨래도 하고 그냥 몰래 자는 거예요. 선생님들 다 아시죠.
기숙사가 없었는데도 학교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며 지냈다. 성원은 울산 기능경기대회 공업전자기기 파트에서 은메달에 입상했다. 회로를 만지고 여러 개의 기판을 조립하여 하나의 제품을 만들고 최종적으로 원하는 파형을 도출해내는 게 과제였다.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도 성원은 이 분야가 적성에 잘 맞다, 재밌다는 생각은 별다르게 하지 않았다. 장학생처럼 집에 부담을 주지 않을 수 있다는 게 공부의 이유이자 목적이었다.
전자과에서는 삼성 반도체에 가장 많이 취업했다. 성원은 기능 올림픽 대회를 준비하느라 기회를 놓쳤고 선생님은 "또 삼성 들어올 거다"라고 했지만 들어오지 않아 더 기다리기보다 현대전자에 입사했다. 그 이후 회사 이름이 바뀌고 분사되는 과정을 몇 번 거쳤지만 일하는 사업장은 2000년 11월 19살에 입사할 당시부터 지금까지 쭉 같은 곳이다. 디퓨전으로 입사를 했다 군대를 갔다 오니 자리가 없다고 씬필름(Thin Film) CVD(Chemical Vapor Deposition, 가스를 활용해 화학반응을 일으켜 웨이퍼상에 박막을 만드는 증착 공정) 쪽으로 배치가 되었다. .
성원은 설비 엔지니어로 주기적으로 부품을 교체하고 닦는 PM(Preventive Maintenance), 설비에 문제가 발생할 시 점검하고 수리하는 BM(Breakdown Maintenance) 등 업무를 수행한다. 같은 공정에서 같은 장비를 다루어도 오퍼레이터와 엔지니어의 업무 공간은 분리돼 있다. 노출되는 위험도 같지 않다.
칸막이로 쫙 돼 있어요. 칸막이를 뒤쪽은 서비스 에리어(service area)고 앞쪽은 프로세스 에리어(process area)여가지고 생산 오퍼레이터가 여기다가 런을 딱 걸고, 저희는 그 문제 있으면 뒤에 가서 조치를 하고 이런 거죠. 딱 나눠져 있어요.
클린룸 안에서도 가려진 뒷공간인 서비스 에리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 2편에서 이어집니다.
이름은 인터뷰이의 요청으로 가명으로 처리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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