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란 전쟁 확전에 따라 주요 기업들이 그동안 공을 들여온 중동 시장이 한순간에 전쟁의 화염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수십 조 원에 달하는 프로젝트가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퍼지고 있다.
4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주요 기업들이 가장 우려하는 대목은 단순히 유가 상승을 넘어선 '프로젝트의 물리적 붕괴'다. 이란이 반격의 대상을 미군 기지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 미국 우방국의 핵심 기간 시설로 확대하면서 한국 기업들이 수주한 대형 프로젝트들이 직접적인 타격권에 들어갔다.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한국 기업의 중동 프로젝트 수주액은 2023년 90억 2100만달러에서 2024년 184억9400만 달러로 1년 만에 두 배 이상 급증했다. 사우디의 꿈이라 불리는 '네옴시티'를 비롯해 UAE의 AI 데이터센터 프로젝트 '스타게이트', 대규모 원자력 발전소와 신재생에너지 단지 등 현재 진행 중이거나 예정된 프로젝트 규모만 합산해도 100조원을 훌쩍 넘는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과거 중동 리스크가 단순한 공기 지연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이란의 미사일과 드론이 우리 건설 현장이나 완공된 인프라를 직접 겨냥하는 상황"이라며 "최악의 경우 수년간 공들인 프로젝트가 무산되거나 시설이 파괴되는 시나리오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적 파급 효과는 이미 지표로 나타나고 있다. 이란이 한국 수입 원유의 7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나설 조짐을 보이자 유가와 해상 운임이 폭등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분석에 따르면 유가가 10% 상승할 경우 국내 기업의 생산원가는 0.38% 오르고, 전체 수출은 0.39% 감소한다.
특히 자동차, 가전, 타이어 등 해상 운송 비중이 높은 업종은 직격탄을 맞았다. 홍해 항로가 막혀 아프리카 희망봉으로 우회할 경우 운송 기간은 2주 이상 길어지고 운임은 최대 80%까지 치솟는다.
석유화학 업계 역시 '산업의 쌀'인 나프타 가격 상승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에 직면했다. 이란이 지난 2일 사우디와 카타르의 원유 및 액화천연가스(LNG) 시설을 타격하면서 공급망 불안은 현실이 됐다.
중동 내수 시장의 침체도 뼈아픈 대목이다. 삼성전자는 2025년 3분기 기준 중동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34%로 압도적 1위를 기록 중이며, 현대차그룹은 사우디 자동차 시장에서 23.7%의 점유율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전쟁 장기화로 소비 심리가 위축되면 가전과 자동차 등 주력 수출 품목의 판매 급감이 불가피하다. 최근 큰 인기를 끌던 K-푸드와 K-화장품 역시 물류난과 소비 위축이라는 이중고에 처했다.
현지에 진출한 148개 한국 기업은 임직원 안전 확보에도 비상이 걸렸다. 사우디 현지에서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와 합작 조선소를 건설 중인 HD현대그룹은 임직원 130여명을 즉각 재택근무 체제로 전환했다. LG전자 역시 네옴시티와 AI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냉난방공조(HVAC) 사업 관련 인력들의 안전을 실시간 점검하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물론 모든 산업이 암울한 것만은 아니다. 전쟁의 비극 속에서도 한국 방산업계는 오히려 수요 급증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중동 국가들이 이란의 미사일 위협에 노출되면서 방공망 확충이 시급해져서다.
실제로 UAE에 배치된 국산 중거리 지대공 미사일 '천궁-II'가 최근 이란의 미사일을 성공적으로 요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사우디와 이라크 등 주변국의 추가 주문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중동의 불안정이 장기화할수록 지상 무기와 항공 전력 증강을 위한 '러브콜'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업계에선 이번 중동 사태가 단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산업연구원 관계자는 "과거의 중동 전쟁이 석유 수급 문제에 국한됐다면, 지금은 첨단 산업 인프라와 글로벌 공급망 전체가 얽혀 있는 복합 위기"라며 "정부와 기업이 긴밀히 협력해 물류 루트 다변화와 원자재 비축량 확대 등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한 '컨틴전시 플랜'(비상 대응 계획)을 즉각 실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성대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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