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 증권사 여직원들이 ‘여직원 예절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지점장 검열 앞에 선다. 스타킹 색부터 머리망 상태, 치마 길이 등 복장 규정 준수 여부 등을 확인하고, “여직원은 꽃”이라는 취지의 훈시가 이어진다.
최근 방영 중인 한 드라마가 재현한 1990년대 금융권의 풍경이다. 2026년 현재, 과거처럼 복장을 일률적으로 규정하거나 외모를 직접적으로 점검하는 방식의 통제는 크게 줄었다는 평가가 많다. 복장 자율화가 확산됐고, 신입 채용에서 여성 비중이 과반을 넘는 사례도 더는 낯설지 않다.
다만 현장과 전문가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규정이 완화됐다고 해서, 차별이 함께 사라졌다고 단정하긴 어렵다”고 말한다. 통제의 방식이 신체·복장 같은 ‘가시적 규율’에서 임금·성과급·보직 배치 같은 ‘제도 내부의 분배 구조’로 옮겨갔을 가능성을 짚는 것이다.
26일 금융권과 국회노동포럼 등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주요 금융사 48곳의 임금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성별 임금 격차는 평균 30.7%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일부 대형 금융사들은 현행 공시 대상이 아니라는 명분으로 자료 제출조차 하지 않은 만큼, 실제 격차는 더욱 심각할 것이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이런 격차는 금융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도 확인된다. 여성가족부·고용노동부의 ‘2024년 여성 경제활동 백서’에 따르면 2023년 여성의 시간당 평균 임금은 1만8502원으로 남성(2만6042원)의 약 71% 수준이었다. 월평균 임금 격차도 31.2%로, OECD 회원국 가운데 성별 임금격차가 가장 큰 수준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결혼 퇴직제’에서 ‘이미지 통제’까지…배제의 역사
금융권 여성 차별은 시대에 따라 기제가 달라져 왔다. 1970~1980년대에는 ‘결혼 퇴직제’가 대표적이었다. 결혼을 이유로 사직을 요구하거나 각서를 받는 관행이 존재했던 시기다. 1990년대로 오면 배제의 방식이 ‘이미지 통제’로 이동했다는 평가가 많다. 여성을 전문직 종사자라기보다 서비스 장식물의 연장으로 보는 시선 속에서 화장법·손톱·스타킹 색상 같은 세부 기준이 직장 규율로 들어오곤 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 국면에서 ‘부부 행원 중 여성’을 우선 대상으로 삼았다는 증언·기록도 반복적으로 거론된다. 이 경험은 이후 유니폼 폐지, 복장 자율화 등 ‘가시적 차별’을 줄이는 흐름을 촉진했지만, 동시에 “조직의 핵심 경로에서 여성이 어떻게 배제되는가”라는 질문은 남겨뒀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대 금융권 격차의 핵심 원인으로 가장 자주 지목되는 건 직종·직무 분리다. 여성 인력이 개인금융 창구, 상담, 사무 지원 등 상대적으로 승진 속도가 느리거나 성과급 비중이 낮은 직무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이다.
반대로 기업금융(CB), 투자은행(IB), 리스크 관리 등 고성과·고성과급이 붙는 핵심 부문은 남성 비중이 높고, 내부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인력 순환이 이뤄져 진입 장벽이 형성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른바 ‘유리 벽(Glass Wall)’ 현상이다.
이 구조에서는 같은 직급이라도 부서·직무 특성에 따라 성과급 격차가 누적될 수 있고, 특정 트랙(핵심 직무 → 핵심 보직 → 임원 후보군)으로 연결되는 ‘인재 파이프라인’에서 여성 비중이 낮아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 실무직 여성 비중은 높지만 상무급 이상 고위 임원에서 여성 비율은 한 자릿수에 머문다는 통계·공시 해석 또한 반복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가족 친화’의 이면…위험과 감정노동의 ‘외주화’
최근 일부 금융사는 여성 리더십 프로그램, 직무 순환 확대, 육아휴직 후 복귀 트랙 개선 등을 내세우며 변화를 강조한다. 다만 현장에서는 “제도는 생겼지만 핵심 부서 배치·평가 관행이 함께 바뀌지 않으면 체감 효과가 제한적일 수 있다”는 평가도 공존한다.
‘패밀리 데이’, ‘정시 퇴근’ 같은 가족 친화 정책이 확산되는 흐름도 있다. 다만 이런 정책이 실제로는 비정규직·외주 노동으로 업무 부담이 이동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문제 제기도 꾸준하다.
대표적으로 콜센터 등 고객 응대 영역은 외주화 비중이 높고, 종사자 다수가 여성인 경우가 많다. 현장에서는 영업점 인력 감축 이후 신입 행원이 외주 콜센터 상담사에게 업무를 되묻는 ‘역전 현상’이 발생한다는 말도 나온다. 업무 숙련도와 책임의 무게는 커졌지만, 고용 형태가 다르다는 이유로 상여금·복지에서 배제되거나 임금 상승 여지가 제한되는 구조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AI 상담 시스템이 고도화된 지금도, 악성 민원 대응이나 감정노동처럼 자동화가 어려운 영역은 여전히 사람에게 남는다는 점에서 “기술 발전이 반드시 노동 조건 개선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평가도 덧붙는다.
성과급·보직이 갈라놓는 임금…성평등 공시 ‘권고’ 넘어 제도화 목소리
전문가들은 시대를 이어 온 여성에 대한 차별이 사라졌다기보다는 보이지 않게 재배치됐다고 본다. 성별 임금 격차가 OECD 최고 수준이라는 지적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업권별·직무별 격차를 더 세밀하게 드러내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난주 연구위원은 현재 상황을 ‘차별의 장소 이동’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며, “과거 유니폼과 머리망이 여성의 노동을 시각적으로 보조화했다면, 현재는 임금 정보의 폐쇄성과 비정규직 외주화라는 장막 뒤로 차별이 숨어버렸다”고 분석했다. 이어 “임금 격차 30.7%라는 지표는 임원의 부재, 직종 차별, 비정규직 비중의 심화가 집약된 결과물”이라며, “금융업은 여성 인적 자원 활용도가 높은 산업임에도 독보적인 격차를 기록하고 있는데, 겉모습이 나빠지지 않았다고 개선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제언했다.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김희향 대표 역시 데이터에 기반한 구조적 접근을 강조했다. 김 대표는 “사원급에서도 여성 임금이 낮게 나타나는 패턴이 관측된다면, 개인 성과만으로 설명하기 어렵고 구조를 함께 봐야 한다”며 “특히 금융권처럼 성과급·보직 구조가 임금에 직접 연결되는 산업일수록, 성별에 따른 상세 임금 공시가 권고에 그치지 않도록 제도화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공시 정보가 투자자·이해관계자에게도 인사·노무 리스크를 판단하는 지표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다만 공시 제도 확대를 두고는 기업 현장의 우려도 나온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직무·직급·지역·고용 형태가 복잡한 금융업 특성상 산정 방식이 통일되지 않으면 오인이 커질 수 있고, 개인정보 보호와 행정 부담 문제도 함께 풀어야 하는 만큼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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