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길갑순 할머니 아들 "화해치유재단 잔금 日재산" 추심금 청구 소송
서울중앙지법 "배상액 원금 지급해야" 강제조정…성평등부 "내부 검토 중"
(청주=연합뉴스) 이성민 기자 = 일본 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피해 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피해자 유족이 배상금을 지급받기 위해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로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의 일본 정부 출연금을 대상으로 추심 절차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 정부가 이후 합의를 뒤집고 화해치유재단 해산 결정을 내린 만큼 일본이 출연금에 대한 반환청구권을 가지므로 사실상 일본의 재산이라는 논리인데, 재단이 이같은 주장을 받아들인 법원의 추심명령에 불복하면서 유족과의 소송전으로 비화한 상태다.
특히 정부가 그동안 수십억원에 달하는 출연금 잔금의 처분 방향을 정하지 못한 가운데 유족이 일본 정부 출연금에 대해 배상금 추심을 시도하는 첫 사례여서 주목된다.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은 위안부 피해자 고 길갑순 할머니의 아들 김영만(70·청주 거주)씨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1억원 상당의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 신청을 지난해 8월 인용했다.
앞서 김씨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청주지법에 제기한 위안부 피해 손해배상 소송에서 1억원의 손해배상액을 인정받았다.
국내 법원이 위안부 피해자 및 유족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세번째로 인정한 판결이었다.
김씨는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타결 당시 일본 정부가 화해치유재단에 위안부 피해자 지원 명목으로 지급한 출연금을 대상으로 압류·추심을 신청을 했고, 법원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문재인 정부에서 이후 합의를 깨고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결정함에 따라 출연금에 대한 일본의 반환청구권이 발생하므로 사실상 일본의 재산에 해당한다는 게 김씨 측의 주장이다.
출연금 잔액은 화해치유재단 해산 결정 이후 정부가 마땅한 청산 방법을 찾지 못해 현재까지 동결돼 있다.
그러나 화해치유재단은 법원 추심명령에 따른 배상금 지급을 거부했다.
일본 정부의 출연금 반환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고, 따라서 재단이 배상금을 대신 지급해야 할 의무 역시 없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김씨는 화해치유재단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별도의 추심금 청구 소송을 냈고, 한차례 조정 기일을 진행한 법원은 지난 10일 재단이 김씨에게 일본 정부의 배상액 원금 1억원을 모두 지급하라는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강제조정)을 내렸다.
강제조정은 소송 당사자들이 화해하기 어렵다고 볼 때 법원이 직권으로 제시하는 권고안이다. 이의신청이 없으면 정식 재판 없이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화해치유재단의 이의신청 기한은 내달 5일까지다.
다만 주무관청인 성평등가족부가 강제조정을 그대로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성평등가족부 관계자는 "일본이 반환을 요구한 적도 없는데, 재단 해산 결정을 이유로 출연금을 일본에 되돌려줘야 할 채무로 전제하는 원고의 주장이 타당한지 강한 의문을 갖고 있다"며 "강제조정에 어떻게 대응할지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만약 김씨가 승소하게 되면 위안부 피해자 측이 일본 정부의 화해치유재단 출연금을 배상금으로 추심하는 첫 사례가 된다.
김씨에 앞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의 한국 내 재산을 파악하기 위해 법원에 '재산 명시'를 신청했으나 일본 정부가 서류 송달을 거듭 거부해 결국 '각하' 처분됐다.
김씨의 법률대리인인 법률사무소 고미의 홍성호 변호사는 "설령 일본 정부의 재산 명시가 이뤄지더라도 주권 국가는 타국의 재판을 받지 않는다는 국제법상 국가면제 원칙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는 현실적으로 추심이 어렵다"고 전했다.
이어 "그러나 화해치유재단 출연금은 애초에 일본 정부가 피해자 지원을 위해 지급했고,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라는 기존 입장에 따라 돌려받으려고 할 가능성도 적기 때문에 추심이 가능한 거의 유일한 일본의 국내 재산"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김씨는 화해치유재단이 운영될 당시에도 배상금 지급 신청과 관련해 어떤 안내도 받은 적이 없다"며 "현실적으로 일본 정부의 재산을 압류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정부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의 지원금을 틀어쥔 채 내놓지 않는 것은 도의적으로도 옳지 않다"고 덧붙였다.
화해치유재단은 박근혜 정부 당시 체결된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일본 정부가 피해자 지원 명목으로 출연한 10억 엔(당시 환율 기준 108억원)을 재원으로 2016년 7월 설립됐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서 기존 합의가 피해자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2018년 말 해산 결정을 내리면서 재단의 위로금 지급 업무가 중단됐다.
그사이 재단은 합의 시점 기준으로 생존 피해자 47명 중 35명과 사망 피해자 199명 중 65명에게 '치유금' 명목으로 46억원을 지급했고, 운영비로 10억원을 지출했다. 잔여 기금은 지난해 10월 기준 61억 4천만원이다.
당초 합의대로 출연금을 피해자들에게 사용하라는 일본 정부의 반발과 '공식 사죄 없이는 지원금을 받아선 안 된다'는 시민단체들의 비판 속에 정부는 현재까지 잔금 청산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성평등가족부 관계자는 "잔금을 국고로 귀속하는 방안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출연금을 처분하기에 앞서 일본 정부와 사전 교감이 선행돼야 한다"며 "지난해 잔금 청산과 관련해 외교부에 일본과의 협의 진행 상황을 문의했으나 별다른 진전이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말했다.
chase_aret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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