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전세윤 작가] 가지고 있는 책으로 된 사전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상관없으니 한번 꺼내어 앞에 놓아보자. 갑자기?
‘갑자기’여야 하기 때문이다. 임의의 날짜, 임의의 시간에 임의로 사전을 펼쳐보자. 그리고 눈에 첫 번째로 들어온 단어를 골라보시라.
그 단어가 사물이라면? 그 물건을 구해서 바로 좌대 위에 올리면 된다.
이 과정을 거치면 뭐가 된다.
뭐가?
작품이 된다.
일상적인 기성품을 선택해 예술적 맥락을 부여함으로써 작품이 된다. 이걸 개념화하면 ‘ready-made’. 레디메이드가 된다. 그리고 이 개념의 시작은
이 변기다.
많이들 착각하는데 ‘샘’은 누군가의 이름이 아니라 ‘Fountain’이다. 생각보다 많이들 모르고 있길래 얼굴 붉히는 일이 없길 바라며 한 마디 적어본다.
1917년 뉴욕 그랜드 센트럴 팰리스에서 열린 미국 독립작가협회 주최 전시회. 나름 새로운 시도를 하겠다며 협회 측에서는 전시 참가비만 낸다면 어떠한 작품이든 접수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변기는 실제 전시장에 전시되지 못하고 퇴짜 맞는다.
마르셸 뒤샹이 본인의 이름으로 접수했다면 전시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르셸 뒤샹은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고 리처드 머트라는 가명을 사용해 제출했다. 이게 이 소변기에 R. Mutt 1917이라는 서명이 있는 사유이다.
위에 첨부한 사진이 원본이고, ‘샘’의 원본은 소실되어 없다. 1950~60년대에 뒤샹이 직접 의뢰, 승인한 16개의 복제품만 남아있다.
위에서 말했듯 뒤샹의 작업 방식에는 사전이 등장한다.
임의의 날짜 임의의 시간에 사전을 펼쳐 그 페이지에 나온 단어 중, 가장 중립적인 단어들로 작업했다 한다. (흥미롭거나 주목되는 단어 말고) 그리고 그 단어에 해당하는 물건을 구하거나, 해당하는 상태를 연출하거나, 단어 자체가 별 의미 없으면 그걸 그대로 레디메이드로 이용했다.
뒤샹은 미술이 망막적 요소에 그치는 것뿐만 아니라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예술적 가치는 기술적 숙련도보다 작가가 선택하는 방향과 부여하는 바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누구나 일상 속 사물, 아니면 가까운 무언가를 통해 레디메이드를 할 수 있다. 한번 갑자기 사전을 펼치며 뒤샹식 작업을 여러분도 한번 시도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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