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 Saudi Aramco는 인도 정유·석유화학 부문에 대한 투자 확대를 모색해왔다. 인도 서부 해안에 대규모 정유·석유화학 단지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는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상징성을 지닌다.
인도와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는 오래전부터 석유 탱커 위에서 움직여 왔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에너지 소비국 중 하나이고, 사우디는 세계 최대 산유국 중 하나다. 공급과 수요라는 단순한 공식은 오랜 세월 양국을 묶어온 접착제였다. 그러나 지금 그 공식은 조용히 변형되고 있다. 원유 중심의 관계가 에너지 전환과 산업 다각화, 그리고 지정학적 재편 속에서 새로운 모양으로 재조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는 하루 약 500만 배럴에 가까운 원유를 소비하는 거대 시장이다. 자국 생산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수입 의존도가 80%를 웃돈다.
이 구조는 곧 에너지 안보를 외교 전략의 핵심에 놓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만든다. 반면 사우디아라비아는 막대한 매장량과 생산 능력을 바탕으로 세계 원유 시장의 스윙 프로듀서 역할을 해왔다. 두 나라의 이해관계는 오랫동안 ‘안정적 공급과 안정적 수요’라는 문장 안에서 균형을 맞춰왔다.
하지만 국제 에너지 시장은 이제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원유 공급망은 재편됐고, 가격 변동성은 커졌다. 인도는 러시아산 원유를 대폭 수입하면서도 사우디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다층적 전략을 택했다.
이는 단순한 가격 선택이 아니라, 리스크 분산이라는 전략적 판단이었다. 사우디 역시 아시아 시장에서의 점유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인도를 핵심 파트너로 설정하고 있다.
양국 협력은 이제 ‘배럴’ 단위에서 ‘밸류체인’ 단위로 이동 중이다.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 Saudi Aramco는 인도 정유·석유화학 부문에 대한 투자 확대를 모색해왔다. 인도 서부 해안에 대규모 정유·석유화학 단지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는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상징성을 지닌다. 이는 단순한 원유 판매를 넘어, 인도 내에서 부가가치를 함께 창출하는 ‘공동 산업화’ 모델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사우디의 국가 전략인 Vision 2030 역시 인도와의 협력 범위를 넓히는 배경이 되고 있다.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제조업, 관광, 첨단 산업을 육성하려는 이 계획은 대규모 해외 투자와 기술 협력을 필요로 한다. 인도는 IT, 인프라 건설, 인력 공급 측면에서 매력적인 파트너다. 에너지는 이 거대한 교환의 출발점일 뿐이다.
이제 주목해야 할 영역은 재생에너지와 수소다. 인도는 태양광과 풍력 발전 설비를 빠르게 늘리고 있으며, 2070년 탄소중립을 선언했다. 사우디 또한 사막의 태양을 활용한 대규모 태양광 프로젝트와 그린수소 생산 계획을 추진 중이다. 특히 사우디 북서부에서 진행 중인 NEOM 프로젝트는 재생에너지와 수소 산업을 결합한 미래 도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 양국 협력은 이제 ‘배럴’ 단위에서 ‘밸류체인’ 단위로 이동 중이다.
그린수소는 양국 협력의 새로운 키워드다.
사우디는 대규모 생산 기지를 구축해 수출국이 되려 하고, 인도는 향후 철강·비료·운송 부문에서 수소 수요를 늘릴 계획이다. 만약 사우디산 그린수소가 인도 산업단지로 안정적으로 공급된다면, 이는 단순한 연료 거래를 넘어 ‘탈탄소 동맹’으로 진화할 수 있다. 수소 운송 인프라, 암모니아 전환 기술, 장기 구매 계약 등은 이미 실무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다.
전력망과 디지털 인프라 역시 협력의 축으로 떠오른다. 사우디는 스마트 그리드와 데이터센터 구축을 확대하고 있고, 인도는 세계적인 IT 인력과 디지털 서비스 역량을 갖추고 있다. 에너지와 데이터는 미래 산업의 양대 혈관이다. 에너지 프로젝트에 디지털 관리 시스템이 결합되면, 효율성과 투명성이 동시에 개선된다. 이는 투자 리스크를 낮추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지정학적 측면에서도 인도-사우디 축은 의미를 갖는다.
중동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미국이 전략적 우선순위를 재조정하는 상황에서 인도는 균형자 역할을 자임한다. 사우디 역시 동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시장 다변화를 통해 외교적 레버리지를 확대하려 한다. 양국의 에너지 협력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다극화 세계에서의 전략적 포지셔닝과 직결된다.
물론 과제도 있다.
인도의 에너지 수요는 급증하고 있지만, 인프라 병목과 규제 환경은 여전히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사우디는 재정 다각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투자에 따른 재정 부담을 관리해야 한다. 또한 글로벌 탄소 규제가 강화될수록 화석연료 기반 프로젝트는 금융 조달이 어려워질 수 있다. 이 간극을 메우는 해법이 바로 전환 기술과 장기 파트너십이다.
앞으로 10년은 시험대가 될 것이다.
원유 공급 계약을 넘어, 정유·석유화학 합작, 재생에너지 공동 투자, 수소 장기 구매 계약, 에너지 금융 협력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여부가 관건이다. 에너지 협력이 산업 협력으로, 산업 협력이 전략 동맹으로 확장된다면 인도와 사우디는 새로운 경제 축을 형성할 수 있다.
질문은 하나로 모인다.
석유의 시대가 저물어도 이 동맹은 지속될 수 있는가. 답은 단순하다. 에너지를 ‘자원’이 아니라 ‘플랫폼’으로 재정의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 원유 탱커에서 시작된 관계가 이제는 수소 플랜트와 데이터센터, 스마트 그리드로 이어지고 있다. 인도-사우디 협력은 연료의 거래를 넘어 미래 산업의 설계도로 진화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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