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유독 전 연인들을 나쁘게 말하는 이유
연남동의 조그만 이자카야. 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꼬치구이에 하이볼을 마시던 참이다. 노란 조명이 따뜻하게 내려앉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그가 씁쓸한 표정으로 묻지도 않은 지난 연애사를 꺼낸다.
- - “전 여자친구는 감정 기복이 너무 심했어. 툭하면 울고불고 매달려서 내가 진을 다 뺐지. 그전 사람은 너무 이기적이었고. 난 왜 이렇게 피곤한 사람만 만나는지 모르겠어.”
그의 한숨 섞인 푸념을 듣고 있으면 묘한 안도감이 스친다. 저렇게 힘들게 연애했구나. 이 사람은 참 다정하고 진지한데 상대방들이 하나같이 이상했구나. 나는 저런 피곤한 여자가 되지 말아야지. 그의 상처를 덮어주는 쿨하고 성숙한 연인이 되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스스로 자기 목에 무거운 족쇄를 채우는 셈이다.
상한 음식만 내놓는 식당은 없다
모든 전 연인이 ‘미친 사람’이거나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기괴하다. 가는 식당마다 밥에서 쉰내가 난다고 불평하는 손님이 있다면, 식당들이 문제인지 그 손님의 미각이나 위생 상태가 고장 난 건지 먼저 의심해 봐야 한다.
내현성 나르시시스트는 연애의 모든 실패 원인을 바깥으로 던져버린다. 자기가 상대를 불안하게 방치하고 감정을 갉아먹은 시간은 까맣게 지워버린다. 참다못해 폭발해버린 상대의 마지막 모습만 교묘하게 잘라내어 자신이 끔찍한 피해자인 양 전시한다.
- - “걔는 진짜 집착이 심했어. 내 개인 시간을 하나도 안 주려고 했지.”
과거에 대한 하소연이 아니다. ‘앞으로 네가 나에게 연락 문제로 서운함을 표현하거나 애정을 요구하면, 너도 그 집착 심한 전 연인과 똑같이 취급하겠다’는 서늘한 사전 경고다.
이 경고장을 받아 든 당신은 스스로 입을 틀어막게 된다. 서운한 일이 생겨도 참는다. 연락이 안 돼도 속으로만 끙끙 앓는다. 조금이라도 불만을 이야기하면 그가 진저리 치던 ‘피곤하고 예민한 전 여자친구’ 프레임에 갇힐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숨 한 번 편하게 쉬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연애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다.
칭찬의 탈을 쓴 차가운 도마
그들은 틈날 때마다 당신과 전 연인들을 비교한다. 물론 처음에는 철저히 당신을 치켜세우는 방향이다.
- - “넌 걔네들이랑은 진짜 차원이 달라. 넌 내 마음을 알아줘서 너무 좋아.”
가슴이 뿌듯해지고 어깨가 으쓱해진다. 까다로운 그의 마음에 쏙 드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는 우월감에 취한다. 내가 이 사람에게 정말 특별한 구원자가 된 기분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주던 그의 진가를 나만 알아보고 품어준다는 착각에 깊이 빠져든다.
달콤한 칭찬의 속내는 전혀 다르다. ‘지금은 네가 내 입맛에 맞게 고분고분하게 구니까 합격점을 주지만, 내 통제에서 벗어나는 순간 너도 언제든 도마 아래로 내쳐질 수 있다’는 무언의 압박이다.
우월감은 곧 목을 조르는 밧줄로 변한다. 칭찬을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자기 검열을 한다. 화가 나도 쿨한 척 웃어넘기고, 무리한 부탁을 받아도 이해심 많은 척 수용한다.
본래의 자연스러운 감정은 억누르고 그가 만들어놓은 ‘착하고 말 잘 통하는 완벽한 연인’이라는 좁은 틀에 자신을 억지로 구겨 넣는다. 조금이라도 그 틀을 삐져나가면 차갑게 식어버릴 그의 눈빛이 무서워 전전긍긍한다.
입맛에 맞게 재료를 다듬듯 당신의 고유한 성격을 무참히 썰어내고 있는 거다.
쉰내 나는 감정을 대신 삼키는 노동
데이트 내내 전 연인들의 흉을 듣는 일은 고역이다. 불평불만을 들어주고 맞장구쳐주는 동안 당신의 에너지는 쑥쑥 빠져나간다. 맑고 신선한 감정을 나눠야 할 연애 초반에, 남이 남기고 간 쉰내 나는 음식물 쓰레기를 대신 치워주는 꼴이다.
- - “나 진짜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치가 떨려. 네가 날 좀 위로해 줘.”
자신의 과거 상처를 들먹이며 끊임없이 당신의 관심과 위로를 착취한다. ‘나는 억울한 피해자니까 너는 맹목적으로 나를 돌보고 내 투정을 다 받아내라’는 억지다.
당신은 기꺼이 그의 투정을 받아주고 위로의 말을 건넨다. 이만큼 공감해 주면 그도 언젠가 내 마음을 알아주겠거니 기대하며 감정을 퍼붓는다.
여기에 당신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 당신의 하루가 어땠는지,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는 안중에도 없다. 오직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 일을 당했는지 알아달라는 떼쓰기만 존재한다.
관계의 무게중심은 철저하게 그에게 쏠려 있다. 당신은 그저 그의 억울함을 해소해 주고 자존감을 채워주는 감정의 무급 노동자로 전락한다. 그의 텅 빈 속을 채우기 위해 당신의 맑은 일상마저 시큼하게 썩어 들어간다.
다음 레퍼토리의 주인공은 정해져 있다
계속 그 사람 곁에 머문다면 결말은 뻔하다. 당신이 지쳐서 그만하자고 돌아서는 순간, 당신 역시 그가 다음 사람에게 들려줄 ‘이유 없이 나를 떠난 표독스러운 전 연인’의 목록에 추가된다.
모든 전 연인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백 퍼센트 확률로 당신도 나쁘게 말한다. 그 사람의 서사 속에서 언제나 본인은 흠집 하나 없는 순백의 피해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다음 레퍼토리에 미친 전 여자친구로 올라가는 걸 두려워할 필요 없다. 쿨하고 완벽한 연인으로 남으려는 헛된 노력을 멈추는 게 낫다.
억울하게 매도당할까 봐 덜덜 떨며 비위를 맞추는 대신, 기꺼이 나쁜 년 소리를 듣고 그 쉰내 나는 식당에서 걸어 나오면 된다.
뒤통수에 대고 온갖 비난을 쏟아내더라도 신경 쓸 것 없다. 그가 떠들어대는 악담은 결국 자기 얼굴에 뱉는 침에 불과하다. 더 이상 남의 상한 감정을 대신 치워주며 맑은 일상을 망치지 않는 편이 훨씬 이득이다.
조용히 짐을 챙겨 그 지긋지긋한 도마 위에서 내려오면 그만이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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