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맞는 아내'의 인생을 바꾼 편지 한 통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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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맞는 아내'의 인생을 바꾼 편지 한 통은 무엇이었을까

엘르 2026-02-26 01:37:12 신고

아버지에게 맞고 사는 어머니를 보고 자란 딸의 분노는 이상하게도 피해자인 어머니에게로 향하곤 합니다. 어머니는 멍투성이 얼굴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집안일을 하고, 아버지가 주먹을 휘두르려는 분위기가 잡히면 자연스레 맞을 준비를 합니다. 분명 스스로 상황을 바꿀 수 있을텐데, 어머니는 폭력에 순응한 것처럼 보입니다. 딸은 그런 어머니에게 "당신처럼은 사느니 죽을 것"이라고 독한 말을 뿜어냅니다. 아버지에게 낼 화가 어머니에게로 굴절되는 건 어머니에게 인간다운 삶을 회복할 여지가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겐 도저히 불가능할 일이죠. 하지만 자포자기 상태의 어머니에게는 늘 무력감이 드리워져 있고, 이는 딸에게로 세습됩니다. 사실 어머니의 어머니도 그런 무력감을 보고 배웠을 지도 모릅니다.


영화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영화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맞는 어머니'와 '화내는 딸'이 나오는 영화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의 배경은 여성 참정권이 법적으로 확립된 1946년의 이탈리아입니다. 델리아(파올라 코텔레시)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집으로 돌아온 남편 이바노(발레리오 마스딴드리아)와 세 자녀, 지병으로 자리를 보전한 시아버지 오토리노(조르지오 콜란젤)과 허름한 반지하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는 남편에게 아침 인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뺨을 맞습니다. 화를 내거나 울기는 커녕 참전 용사라고 거들먹대는 이바노에게 용돈까지 쥐어줍니다. 이바노는 받은 돈을 술, 도박, 창녀에 착실히 쓰고요. 딸 마르첼라(로마나 마조라 베르가노)는 '여자에게 대 줄 학비는 없다'는 아버지 탓에 중학교 대신 공장으로 보내졌습니다.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학교에 가는 두 남동생의 뒷바라지를 하는 모습에서 어머니가 겹쳐 보이기도 해요. 델리아와 다른 점이 있다면, 마르첼라는 어머니에게 모든 짜증을 푼다는 거죠.


델리아는 가사부터 시작해 하루 종일 간병인도 했다가, 삯바느질을 하고, 남의 빨래를 대신 하며 돈을 법니다. 하지만 가족 누구도 그에게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일지 궁금해질 즈음, 남편에게 들키지 않도록 번 돈을 조금씩 숨겨 두는 델리아가 포착됩니다. 차곡차곡 쌓인 돈은 마르첼라에게 새 웨딩드레스를 사주기 위한 저축입니다. 마르첼라는 시내의 큰 젤라또 가게 아들인 남자친구로부터 프러포즈를 받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바노는 드레스 값이 아깝다며 델리아가 결혼식 때 입었던 걸 고쳐서 입히라고 합니다. 애초부터 낡았던 드레스를 딸에게 물려 주라니, 델리아는 다른 건 다 참아도 이것만은 참을 수 없습니다.


영화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영화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델리아의 유일한 일탈은 가끔씩 근처에 사는 첫사랑을 보러 가는 일입니다. 여전히 델리아를 사랑하는 전 남자친구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함께 떠날 것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델리아의 삶에는 딸 마르첼라에게 예쁜 새 드레스를 해 주고 싶다는 욕망이 끼어들었습니다. 그래서 델리아는 갈등합니다. 영원히 가족에게 희생하는 걸로 스스로의 가치를 찾을지, 아니면 자신만을 생각하며 이루지 못한 오랜 사랑을 되찾을지를 두고 말이죠.


영화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영화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마르첼라는 남자친구로부터 염원하던 프러포즈를 받고, 상견례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누추하기 짝이 없는 집이 창피합니다. 매일 부시시한 머리에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어머니도, 괴팍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무례한 말투며 행동을 빼다 박은 동생들도 부끄럽습니다. 델리아는 마르첼라를 위해 최선을 다해 상견례를 준비하지만 불안했던 요소들이 전부 튀어 나옵니다. 이바노는 "넌 노예로 부릴 가치도 없다"며 상견례 날까지 델리아를 잔인하게 때리고요. 결국 델리아는 집을 떠날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어느 날 도착한 의문의 편지를 읽고는 마음을 굳힙니다. 비밀스럽게 가출 계획을 세우지만 역시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가기 직전, 델리아는 아직 시간이 하루 더 남았음에 안도합니다. 이윽고 다음날 밝혀지는 그의 선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어져 온 '매 맞는 아내'의 역사를 부드럽게 끊어냅니다. 델리아는 모성으로 딸을 끝까지 끌어안는 대신 여성 대 여성으로서 마르첼라와 연대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는 참정권을 얻고도 여전히 "입 닥치는 법을 배우라"는 말을 듣는 여자들의 가련한 일상을 비추면서 동시에 그들이 남성 중심 사회에 저항 없이 복무하는 광경을 내보입니다. 다툼 끝에도 '남편에게 이른다'며 으름장을 놓는 여자들에게는 사회에 대한 작은 분노가 있을 지언정 그걸 바꿀 상상력은 없습니다. 상상할 여력조차 없었다는 말이 맞겠죠. 하지만 영화는 각자의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여자들의 투쟁적 변화도 조명합니다. 맞는 어머니를 보고 자라 맞는 어머니가 된 여자들은 이제 대대로 물려받은 낡은 드레스를 딸에게 넘길 생각이 없습니다. 마을의 누구보다도 최악의 가부장제를 몸소 체험 중이던 델리아마저도요.


영화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영화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80년 전의 이탈리아 모습이 지금의 한국과 다르지 않다는 뻔한 말은 이제 지겹습니다. 내년에도 여성 인권에 혁명적인 개선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의 어머니들이 천천히 바꿔 나간 미래를 오늘의 딸들은 누리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 시작을 흑백 고전 영화의 형태로 위트 있게 풀어내며 여성의 삶을 변화시킨 작은 용기들에 찬사를 보냅니다. 감독, 각본에 주연까지 맡은 파올라 코텔레시는 〈인생은 아름다워〉의 로베르토 베니니와 비견할 만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는 여성의 날을 앞둔 3월 4일 개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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