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온디바이스 인공지능(AI) 확산으로 가전제품의 메모리 탑재량이 늘면서 제조 원가 구조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가격 상승이 완제품 원가에 직접 반영되자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보급형 물량 확대 대신 프리미엄과 기업간거래(B2B) 중심으로 전략을 선회하는 분위기다. 가격 민감도가 높은 중저가 시장보다 마진 방어가 가능한 고급 AI 가전에 집중, 가전 산업의 성장 축이 ‘판매량’에서 ‘단가와 설계 경쟁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같은 흐름은 북미 시장에서 먼저 가시화됐다. 지난 17~19일 미국 올랜도에서 열린 북미 최대 주방·욕실 전시회 ‘KBIS 2026’에는 약 650개 기업과 4만여명의 관람객이 몰렸고,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글로벌 주요 업체들은 보급형 대신 AI 기반 초프리미엄 빌트인 제품을 전면에 배치했다. 북미주방욕실협회(NKBA)는 올해 초고가 가전 성장률을 4.5~6.1%로 제시하며 보급형(3.6%)을 웃돌 것으로 전망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전략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삼성전자는 럭셔리 빌트인 브랜드 ‘데이코’를 앞세워 미국 플로리다 비에라의 고급 주택단지 ‘아리페카’ 260세대 전 가구에 가전을 공급한다. 1도어 컬럼 냉장·냉동고, 와인셀러, 듀얼 스팀 레인지 등 주방 가전 6종이 패키지로 적용될 예정이다. 현지 맞춤형 건설사와의 B2B 계약을 통해 설계 단계부터 가전이 포함되는 구조다.
LG전자도 북미 주방가전 B2B 매출이 2024년 60%, 지난해 40% 증가하며 2년 연속 두 자릿수 성장세를 이어갔다. 연간 약 70억달러 규모의 미국 빌트인 시장에서 제너럴 일렉트릭(약 30%), 월풀(약 15%)에 이어 연내 ‘빅3’ 진입을 목표로 제시했다. 미국에서는 냉장고·후드·조리기기 등 주요 빌트인 가전이 갖춰져야 주택 준공이 가능해, 초프리미엄 SKS와 빌더 전용 라인업을 앞세워 건설사 직공급 비중을 확대하고 있다.
프리미엄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기반은 단연 AI다. 과거에는 음성 인식이나 화면 기능이 중심이었지만, 최근에는 에너지 효율 개선과 유지비 절감이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냉장고 컴프레서를 사용 패턴에 맞춰 제어하고, 세탁·건조 과정은 딥러닝으로 옷감 손상을 줄이며, 욕실 설비는 누수를 감지해 자동 차단한다. AI가 전력 사용량, AS 빈도, 부품 교체 주기까지 관리하는 단계로 진입하면서 가전의 수익 모델에도 변화가 뚜렷하다.
이런 추세 전환의 배경에는 ‘칩플레이션’이 꼽힌다. AI 투자 확산으로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 가격이 오르며 완제품 원가가 상승한 가운데, 가전업체들은 중저가 라인업 확대 대신 가격 인상분을 기능 혁신으로 설명할 수 있는 프리미엄 제품에 역량을 집중하는 모양새다. 일시불 부담을 낮추기 위해 월 구독 모델을 병행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KBIS에서는 B2B 관리 설루션을 전면에 내세운 움직임도 두드러졌다. LG전자의 ‘씽큐 프로’처럼 단지 내 가전을 실시간 모니터링하고 사전 고장 감지, 원격 AS, 에너지 관리까지 지원하는 플랫폼이 소개됐다. 가전 판매에 운영·관리 서비스가 결합되면서, 매출 구조는 단발성 판매에서 장기 운영 기반으로 이동하는 모습이다.
가전 구매 방식 자체도 달라지는 분위기다. 건설사와 건물 관리 주체가 초기 구매 가격뿐 아니라 유지보수 비용과 에너지 효율을 포함한 총소유비용(TCO)을 함께 고려, 경쟁 기준도 생산 규모보다 설계 참여도와 데이터 기반 운영 역량으로 옮겨가는 양상이다.
글로벌 경쟁 구도도 갈라지고 있다. 중국 업체들이 강점을 보이는 영역은 온오프라인 유통망을 앞세운 보급형 판매다. 대량 생산과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리테일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지만, 북미 고급 주택 시장은 설계 단계부터 냉장고·후드·조리기기 등 빌트인 가전이 포함. 설치 이후 유지·관리까지 요구되는 구조로 단순 단가 경쟁만으로는 진입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반면,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데이코·SKS 같은 빌트인 브랜드에 건설사 직공급, AI 기반 관리 플랫폼을 결합해 ‘제품 판매’가 아닌 ‘주거 패키지’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초기 납품 이후에도 구독형 서비스와 원격 유지관리 계약을 연계해 장기 매출을 확보하는 구조다. 가격보다 설계 참여도, 빌더 네트워크, 운영 데이터 축적 능력이 성패를 가르는 시장으로 재편되는 흐름이다.
한 가전업계 관계자는 “AI 탑재 확대와 반도체 가격 상승이 겹치면서 과거처럼 물량으로 시장을 넓히는 전략은 한계가 있다”며 “앞으로는 설계 단계 참여, 빌더 네트워크, 운영 데이터 확보 능력이 기업 가치와 직결되는 구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판매량보다 설계 참여와 장기 계약을 확보하는 기업이 시장을 주도할 것”이라며 “국내 역시 원가 구조 변화의 영향을 받는 만큼, 단가와 서비스 경쟁력이 기업 성과를 좌우하는 흐름이 강화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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