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총알’처럼 느껴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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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총알’처럼 느껴지는 이유

평범한미디어 2026-02-24 12:16:04 신고

[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 카페에서 스무살 청년들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은 적이 있다.

 

벌써 스무살이 끝나가네.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지? 내가 벌써 21살이라니.

 

이제 갓 스무살 청년인데 나이와 시간을 논하고 있었다. 심지어 청소년들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프랑스 심리학자 피에르 자네에 따르면 현재의 시간을 자신이 살아온 전체 시간과 비교해 인지한다. 5세 아이에게 1년은 인생의 20%에 해당하는 꽤 긴 시간이지만, 50세 성인에게 1년은 고작 전체 인생의 2%일 뿐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시간의 상대적인 비중이 줄어들어서 시간이 점점 더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져야 정상이지만 한국 사회는 모든 연령의 한국인들에게 ‘시간 압박’을 부여한다.

 

한국인들은 항상 시간 압박에 시달리는데 그중에서도 대도시에 사는 직장인이 대표적이다. <그래픽=제미나이 AI 생성>

 

한국인에게 시간은 항상 빠르게 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나이는 경쟁력 요소로 여겨지는 한국적 문화 현상이 있다.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말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대한민국은 불과 50년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압축 성장의 교본 같은 국가라는 점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사실이다. 그만큼 현대 한국인의 DNA는 뭐든지 “빨리 해야 되고, 남보다 뒤처지면 안되고, 경쟁에서 밀리거나 탈락하면 안 된다”는 통념으로 새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개인이 처한 삶의 생애주기마다 대입, 취업, 결혼, 출산, 승진, 내집 마련 등등을 해내지 못하면 낙오된다는 공포감(FOMO)에 알게 모르게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현재와 지금의 시간을 즐기기보단 언제나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하는 에너지를 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의 삶과 감정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니 항상 시간은 총알처럼 지나가버리는 것으로 체감된다.

 

좁은 땅덩어리와 높은 인구 밀도는 필연적으로 ‘초정밀 비교’ 풍토를 만들어낸다. SNS와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타인과 나의 일상을 끊임없이 저울질하게 만드는데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일을 더 짧은 시간에 해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리적 시간은 동일하지만 그 안에 채워 넣어야 할 ‘과업의 밀도’가 과부하되면서 심리적 체감 시간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흐르는 것이다. 한국인의 노동 시간은 OECD 선진국들 중 최상위권에 속하는데 장시간 노동과 출퇴근 전쟁은 뇌를 ‘자동 항법 모드’로 탑재시킨다. 한국인의 통상적인 뇌 메커니즘은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반복되는 일상 사이클을 ‘중요하지 않은 데이터’로 분류해서 삭제해버린다. 그러다보니 연말에 “내가 올해 뭐 했지?”라고 떠올려보면 딱히 한 게 없는데 벌써 1년이 지나갔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사실 1년 동안 특별하고 재밌는 경험들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주로ㄷ 치열하게 ‘존버’하는 것에 많은 에너지를 쏟다보니 그것들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뇌의 공간이 부족한 것이다. 연말에 뇌가 꺼내 볼 기억의 파일이 존버 항목 외엔 별로 없는 것 같으니 “시간이 증발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시간이 총알처럼 빠른 이유는 우리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한국 사회라는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늦추는 법은 벨트에서 잠시 내려와 효율적이지 않은 ‘나만의 샛길’을 만드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엄마 방건영씨는 ‘PDS 다이어리’를 작성해보라고 조언했다. 정신 없이 바쁜 육아를 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경험해보라는 것이다. PDS 다이어리는 Plan, Do, See의 약자로 계획, 실천, 평가 과정을 반복하는 시간 기록형 다이어리를 말한다. 1시간 또는 10분 단위로 세밀하게 하루를 기록하고 전날 목표를 세워 실천율을 체크하며 자기 성찰을 모색한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해보면 좋은데 방씨는 특히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잃지 않고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력 추천했다. 이를테면 하루를 30분 단위 48개의 타임으로 나눠서 모든 일정을 기록하고 각 활동별 색깔을 구분해서 표기한다. 집안일, 직장 업무, 자영업, 성경 읽기, 만남, 운동, 독서 등등 다양한 활동을 기록해보고 오늘 뭐 했는지 곱씹어보고 의미를 부여해보는 것이다. 방씨는 PSD 다이어리를 쓰게 되면서 ‘미라클 이브닝’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원래 야행성이라 미라클 모닝을 하지 못하는 대신 아이들이 잠든 후의 고요한 밤 시간을 활용하는 미라클 이브닝을 통해, 하루 30분이면 총알처럼 흐르는 시간에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않고 나의 삶을 기록하고 곱씹으며 살 수 있다.

 

난 아이를 낳고 육아하면서 대학을 다녔다. 그때 알았다. 아이 엄마로서 사는 삶이 아닌, 나라는 사람으로서 평가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성적과 무관하게 학교에 가면 출석부에서 내 이름 석자가 불리는 게 너무 반가웠다. 보통 엄마들은 병원에 가도 누구 아이 어머니 이렇게 불린다. 근데 나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그 자체가 이게 결국 내가 아이를 키우더라도 중심을 가져가야 하는 나라는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그땐 정신 없이 훅 지나가긴 했지만 PDS 다이어리 적어놓은 걸 나중에 보니 너무 재밌었다. 그땐 너무 힘들고 과제하고 시험 공부하고 시달렸어도 그게 나한테는 의미가 있는 꽉찬 시간이었다는 것도 알았다. PDS가 자기계발법으로 알려졌는데 그냥 내 삶의 기록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삶을 기록하라는 것이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면,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라는 것은 삶의 태도와 관련이 깊다. 유튜브에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이유’를 검색해보면 알 수 있는데 결국 모든 전문가들이 새롭고 다양한 경험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는 물리적으로 측정 가능한 객관적인 시간 ‘크로노스’와 뇌가 인지하는 의미 있고 특별한 순간들의 주관적인 시간 ‘카이로스’를 분류해서 설명했다.

 

실제로 카이로스의 시간이 인간의 뇌와 몸안에서 크로노스의 시간에도 영향을 끼친다. 재밌는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고 더 오래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동기부여의 메커니즘이기도 한데 내가 새로운 경험을 해서 즐거운 순간들과 뿌듯함을 느낀다면 이것들이 다른 세포들과 몸의 대사에 영향을 끼친다.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해야 크로노스의 시간들로 정해진 세포의 삶도 늘릴 수가 있는 거지. 그러한 경험들을 놓치고 똑닥똑닥 재미없는 삶을 산다면 크로노스의 삶도 다 살지 못할 수도 있다.

 

재미, 새로움, 다양함으로 규정되지 않는 타율적 경험에 지배되는 삶을 살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삶의 주체성과 자기결정권을 쥐어야 한다는 말로도 치환할 수 있는데 뇌과학을 연구하고 있는 김대식 교수(카이스트)는 ‘내 인생의 감독’이라는 표현으로 비유했다.

 

핵심은 흔히 어른들이 네 인생의 주인공이 돼야지 조연이 되지 말라고 하는데 사실 주인공보다 훨씬 더 좋은 역할이 있다. 감독이 되면 된다. 내가 내 인생을 편집할 수 있다. 나한테 소중한 순간은 기억에 오래 남도록 슬로우모션으로 남겨두고, 괴로운 시간을 압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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