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으로서 가장 두려운 건, 이미 결말을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일이었다.”
장항준 감독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준비하며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역사 속 비극적인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관객을 다시 극장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그는 ‘새로운 해석’보다 인물의 감정과 선택에 집중했다. 그 선택은 캐스팅과 연기, 그리고 수많은 현장 비하인드 전반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지금부터 영화 곳곳에 담긴 흥미로운 비하인드를 살펴보자.
캐스팅 비하인드
단종
단종 역을 고민하던 중, 장항준 감독은 드라마 〈약한 영웅〉을 보게 됐고 박지훈의 눈빛 연기를 보는 순간 “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단종을 약하기만 한 인물이 아니라 내면의 힘을 지닌 인물로 그리고자 했고, 그 분노를 응집해 표현할 수 있는 배우로 박지훈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유해진 역시 박지훈을 두고 “분노를 안으로 모으는 힘이 있는 배우”라고 표현했다.
금성대군
금성대군 역의 이준혁 캐스팅에는 감독의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 “멋있고, 올바르며, 왕족의 기품이 느껴지는 인물.” 그 이미지에 가장 부합하는 배우가 바로 이준혁이었다.
노루골 촌장
안재홍은 장항준 감독의 영화 〈리바운드〉로 맺은 인연 덕분에 합류했다. 배역 선택은 의외로 단순했다. 안재홍이 직접 ‘노루골 촌장’을 택했다는 후문이다.
촬영 비하인드
박지훈 연기 비하인드
유배된 단종의 병약한 이미지를 위해 박지훈은 무려 15kg을 감량했다. 운동이 아닌 극단적인 식이 조절, 사실상 ‘굶다시피’ 하며 체중을 줄였다고 한다.
영월 촬영 당시 기온은 영하 15도. 극 중 치연한 왕의 감정을 표현하던 장면에서, 박지훈이 실제로 흘린 눈물이 뺨 위에서 얼어붙어 촬영이 잠시 중단되는 일도 있었다. 이 장면은 연출이 아닌, 배우의 몸과 감정이 만든 결과였다. 관객에게 전달되는 차가운 공기와 고독감은 그렇게 완성됐다.
애드리브 비하인드
다슬기 식사 장면
영화 속 유일한 애드리브 장면은 엄흥도가 새벽부터 잡은 다슬기를 내밀며 이홍위에게 어필하는 장면이다. 그때 이홍위가 던진 한 마디, “알겠다. 기억하마.” 이 대사는 현장에서 나온 애드리브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영화 전체를 통틀어 박지훈의 애드리브는 이 장면이 거의 유일하다. “자칫 잘못하면 이홍위라는 캐릭터가 가벼워질 수 있다고 느껴 애드리브를 최대한 자제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노랑나비 장면
영화 후반, 엄흥도가 단종을 그리워하는 장면이 원래는 CG로 처리될 예정이었던 ‘나비’가 촬영 현장에 실제로 등장했다. 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유해진의 어깨에 내려앉았고,
장항준 감독은 이 장면을 그대로 엔딩에 사용했다. “엄흥도의 진심에 하늘이 응답한 순간 같았다.” 라며 우연이 만든 기적 같은 장면은, 영화의 여운을 완성하는 결정적 컷이 됐다.
엔딩 장면의 탄생
엔딩에서 단종이 강가에서 손으로 물을 튀기며 노는 장면.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엄흥도. 이 장면은 유해진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 박지훈이 촬영 중 쉬는 시간에 혼자 강가에서 물장난을 치는 사진을 우연히 본 유해진은 이렇게 말했다. “실제 단종이라면, 물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손으로 물장구를 치지 않았을까?” 이 질문은 장항준 감독에게 전달됐고, 결국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면으로 완성됐다.
실제 역사와 다른 지점
유배의 목적
영화
영화 속 엄흥도는 마을의 생계를 위해 ‘유배객 유치 작전’을 펼친다. 단종의 존재는 마을 사람들에게도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실제 역사
그러나 실제 단종의 유배는 ‘세조’의 철저한 정치적 계산에 따른 조치였다. 복위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기 위한 강제적이고 전략적인 격리였으며, 마을의 선택이나 자율과는 무관했다.
한명회의 비주얼과 등장
영화: 유지태가 연기한 한명회는 거대한 체구와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시대의 권력을 시각화한다.
실제 역사: 사료에는 한명회를 두고 “키가 크고 외모가 출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비주얼 자체는 고증에 가까운 설정이다. 다만 영화와 달리, 한명회가 직접 영월에 내려왔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속 등장은 ‘권력의 상징화’에 가깝다.
단종의 최후
영화: 영화에서는 단종이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엄흥도의 손에 교살되는 길을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그려진다.
실제 기록
• 《세조실록》 : 단종이 자결한 것으로 기록
• 야사 : 통인(하인)에 의한 살해로 전해짐
즉, 단종의 죽음은 하나의 정설이 아닌 권력에 의해 모호해진 죽음으로 남아 있다.
엄흥도의 실제 신분
영화: 엄흥도는 마을을 이끄는 ‘촌장’으로 등장한다.
실제 역사: 엄흥도는 영월 관아 소속의 ‘호장’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국장급 지방 공무원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공적인 신분을 가진 관리였기에, 그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다는 사실은 단순한 충성이 아닌 목숨을 건 선택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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