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출산율 0.72라는 숫자가 한국 사회를 짓누르던 시간은 아직 멀리 가지 않았다. 통계는 서서히 반등을 말하지만, 체감의 온도는 여전히 냉랭하다. 그 사이에서 한 편의 로맨틱 코미디가 “아기가 생겼다”는 문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채널A 토일드라마 '아기가 생겼어요'는 저출생 시대의 불안 위에 사랑과 책임, 그리고 가족이라는 감정을 덧입힌다. 작품이 선택한 해피엔딩은 장르적 관습을 넘어, 통계와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시대 정서에 대한 문화적 응답에 가깝다.
국가데이터처는 오는 25일 ‘2025년 출생·사망통계’와 지난해 12월 인구 동향을 발표할 예정이다. 출생아 수는 17개월 연속 전년 대비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으며, 2023년 0.72명까지 떨어졌던 합계출산율은 2년 연속 반등해 0.8명 선을 회복한 것으로 정부는 추정한다. 국회예산정책처의 전망치 역시 0.80명이다. 수치는 분명 바닥을 통과하는 모양새지만, 인구 대체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 반등의 기미와 구조적 위기가 공존하는 과도기적 국면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드라마는 예상치 못한 임신을 파국이 아닌 전환점으로 재배치한다. 극은 경제적 조건이나 제도적 지원 체계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인물 간의 책임, 용서, 연대를 중심에 둔다. 사회 구조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기보다, 관계의 회복을 통해 감정적 안정에 도달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는 현실을 축소했다기보다, 장르가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명확히 설정한 결과로 읽힌다.
청년 세대가 마주한 고용 불안과 자산 격차, 경력 단절에 대한 두려움은 드라마 속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라는 장치에 응축돼 있다.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이 삶을 흔드는 서사는 동시대의 정서와 닮아 있다. 다만 작품은 그 변수를 공동체적 지지와 사랑을 통해 의미 있는 선물로 전환한다. 통계가 말하는 완만한 상승 곡선과 달리, 드라마는 감정의 차원에서 이미 회복 이후의 세계를 선취한다.
글로벌 OTT 환경 역시 이러한 서사 전략과 맞물린다. 라쿠텐 비키(Rakuten Viki), 유넥스트(U-NEXT) 등 해외 플랫폼에서의 호성적은 K-로맨틱 코미디의 정서적 보편성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방증이다. 문화적 맥락이 다른 시청자에게도 쉽게 전달되는 감정 중심 서사, 갈등의 봉합과 관계의 회복으로 귀결되는 결말은 수출 가능한 서사의 조건을 충족한다. 사회적 맥락을 날카롭게 파고들기보다, 보편적 공감대를 확장하는 방향에 초점을 맞춘 선택이다.
여성 서사의 측면에서도 일정한 변화가 감지된다. 극 중 오연서는 임신이라는 사건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일을 이어가며 관계를 재정립한다. 이는 과거 로맨틱 코미디에서 반복되던 희생적 모성 이미지와는 거리를 둔다. 다만 결말은 결혼과 가족이라는 제도적 틀 안에서 완성된다. 주체성은 인정되지만, 그 종착점은 안정과 조화다. 이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 가장 강력한 안전망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결국 ‘아기가 생겼어요’는 저출생이라는 거대한 구조적 문제를 해부하는 대신, 그 위에 놓인 개인의 감정을 섬세하게 다듬는다. 출산율이 0.8명 선을 회복했다는 통계적 신호와 달리, 삶의 체감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 간극 속에서 드라마는 사랑과 책임, 그리고 함께 자라는 가족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급진적인 문제 제기 대신 감정의 안착을 선택한 작품은, 불안의 시대를 건너는 대중문화의 한 방식으로 읽힌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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