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이응 작가]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일, 그리고 그 말들이 활자가 되어 타인의 세계에 가닿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소통이란 결국 나라는 물리적 실체를 대신해 내가 고른 언어들을 앞세워 타인에게 건너가는 과정이다. 나를 대신하는 이 불완전한 기호들이 과연 내 마음의 본질을 온전히 실어 나를 수 있을까. 언어로 접점을 만드는 순간마다 따라붙는 이 의문 때문에, 첫 글의 주제를 정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하기란 참으로 묘한 일이다.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전하려 할 때,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말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골라내고 편집하는 과정을 거친다. 내 안의 감각을 언어라는 틀에 맞춰 다듬어야 하는 이 과정 속에서, 나는 늘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못한 채 남겨진 것들’에 더 마음이 쓰였다. 의미가 어긋나고 오해가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재료라곤 언어뿐이기에 서로에게 기어이 가닿으려 애쓰는 그 치열한 시도들을 나는 오랫동안 관찰하며 고민해왔다. 그것이 이번 칼럼을 통해 나누고 싶은 첫 번째 주제이기도 하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가 될 때”
가끔 내 세계의 가장자리를 확인하게 되는 때가 있다.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영역은 나에게 시작조차 되지 않은 세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다. 내가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범위가 결국 언어가 닿는 지점과 일치한다면, 언어의 한계는 곧 인식의 임계점이 된다.
언어는 다리를 놓지만, 그 다리는 본질적으로 어딘가 끊겨 있다. 내뱉는 순간 발생하는 왜곡과 침묵할 때의 고립과 단절, 이 구조적인 딜레마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가 내 20대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였다.
우리는 흔히 언어를 통해 세계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논리적 질서 안에 가두려 한다. 그러나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감각들은 그 촘촘한 그물망 사이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버린다. 언어는 세계를 파악하는 도구인 동시에, 세상을 잘라내는 틀이기도 하기에 말이 세계의 윤곽을 또렷하게 그려내려 할수록, 언어에 담기지 못한 구체적인 삶의 신비와 생생한 감각들은 무대 뒤로 사라진다. 결국 세계의 한계를 말로 정리하는 행위는 때때로 세계를 온전히 붙잡는 일이 아니라, 말이 담을 수 있는 만큼만 세계를 ‘편집’하고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를 통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짚어냈다. 동시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문장으로 말의 경계를 확정 지었다. 이 두 문장은 묘하게 서로를 밀어낸다. 침묵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그 침묵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해야 하는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우리에게 진정한 소통이란 가능한 것이었을까?
이 막막한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비트겐슈타인을 불러내야 한다. 그가 ‘침묵’ 뒤에 남겨둔 여백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언어의 벽 앞에 멈춰 서는 대신, 불완전한 도구를 들고서라도 삶이라는 거친 대지 위로 걸어 들어갔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언어가 닿지 않는 지점을 통과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예술은 언어의 불완전성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겠다.
나는 예술이 언어가 닿지 못하는 그 절벽 끝에서 비로소 탄생했다고 믿는다. 언어라는 그물로는 결코 담을 수 없었던 것들을 예술이 어떻게 감각적인 실체로 건져 올려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지, 그 불가능해 보이는 연결의 가능성을 이제 찾아보려 한다.
Copyright ⓒ 문화매거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