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미국 연방대법원이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근거한 상호관세를 위법으로 판단한 가운데 글로벌 통상 질서에 제동이 걸렸다. 다만, 전면 관세가 막히자 트럼프 행정부가 품목별·국가별 압박으로 방향을 틀 가능성이 확대되면서 불확실성이 오히려 커지는 모습이다. 자동차에 이어 ‘반도체’가 다음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 20일(현지 시각) IEEPA가 대통령에게 과세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이에 한국을 포함한 주요 교역국에 적용되던 15% 상호관세는 법적 효력을 잃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판결 직후 무역법 122조를 근거로 한 ‘글로벌 관세’ 10~15% 부과 방침을 발표하며 즉각 공백을 메웠다. 122조는 무역적자 확대 등 비상 상황에서 최대 15%의 관세를 150일간 부과할 수 있는 조항이다.
문제는 트럼프 행정부가 실제로 쥐고 있는 핵심 카드가 따로 있다는 점이다.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른 품목관세와 1974년 무역법 301조에 근거한 보복관세 권한은 이번 판결과 무관하게 그대로 유효하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232조와 301조를 직접 거론하며 “동일한 관세 정책을 시행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전면 관세가 막히자, 특정 산업을 겨냥한 ‘안보 관세’로 전선을 옮기는 수순이다.
이미 철강·알루미늄(50%), 자동차·부품(15%)은 232조에 근거한 품목관세가 적용되고 있다. 미 정부는 지난해 의약품, 항공기·제트엔진, 로봇·산업기계에 대해서도 232조 조사에 착수했다. 업계에서는 122조를 단기 ‘징검다리’로 활용한 뒤, 232조와 301조를 조합해 전략 품목을 차례대로 압박하는 시나리오가 유력하다고 보고 있다.
자동차는 이미 사정권에 들어 있다. 지난해 한·미 협상으로 관세율이 25%에서 15%로 낮아졌지만, 최근 미 정부는 한국 국회의 대미투자특별법 처리 지연을 이유로 재인상 가능성을 시사했다. 관세가 무역 수단을 넘어 입법과 투자 이행을 압박하는 레버리지로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다음 표적으로 거론되는 건 반도체다. 지난해 한국의 대미 반도체 수출은 133억7000만달러로 자동차(295억9000만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컸다. 기존 상호관세 체계에서 반도체는 사실상 무관세가 유지돼 왔다. 미국이 인공지능(AI) 인프라 확장 국면에서 안정적인 메모리 공급이 필요한 만큼, 관세 부과가 자국 빅테크의 투자와 비용 구조에 직격탄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작용했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해석이다.
단기적으로 반도체가 글로벌 관세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정회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은 “이번 판결은 상호관세 근거인 IEEPA에 관한 판단일 뿐, 반도체에 적용되는 무역확장법 232조와는 별개”라며 “곧 시행될 글로벌 관세에 반도체가 포함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단기적으로는 적용 가능성이 크지 않아 보인다”고 내다봤다.
그럼에도 반도체에 대한 관세 유예가 구조적으로 보장된 것은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호관세 무효 이후 232조·122조·301조는 물론 201조와 관세법 338조까지 거론하며 법적 무기고를 전면 개방했다. 반도체를 직접 겨냥한 고율 관세 대신, 미국 내 생산 공장에 면제를 제공하는 방식의 ‘관세+투자 유인’ 패키지가 병행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업계에서는 관세의 최종 목적이 가격이 아닌 제조 인프라의 미국 이전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국 정부도 전시 체제에 돌입했다. 정책실장·안보실장을 중심으로 여당 지도부까지 참여한 긴급회의가 이어졌고, 산업통상자원부는 민관 합동 대책회의를 열어 업종별 영향을 점검 중이다. 상호관세와 자동차 관세 인하를 대가로 약속한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와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MASGA)도 협상 지렛대이자 동시에 부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기존 합의를 흔들 경우 미국이 ‘본보기 제재’에 나설 수 있다는 경계감도 나온다.
여기에 중국 변수도 겹쳤다. 상호관세와 함께 중국을 옥죄던 ‘펜타닐 관세’까지 무효가 되면서, 그동안 이중 관세 부담을 안고 있던 중국 수출기업들이 단기적으로 가격 경쟁력을 회복할 가능성이 커졌다. 미국 시장에서 반도체·가전·기계류를 놓고 중국과 직접 경쟁하는 한국 기업들로선, 관세 공백 국면에서 중국이 먼저 숨통을 틀 경우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업계에서는 미·중 갈등의 압박 강도가 일시적으로 낮아질 경우, 중국은 관세 부담 완화로 가격 경쟁력을 회복하는 반면, 한국은 대미 투자와 공급망 재편 요구를 동시에 떠안는 비대칭 구조가 형성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반도체와 조선, 가전 등 전략 산업에서 미국의 생산기지 이전 압박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중국은 숨통이 트이고 한국만 추가 부담을 지는 ‘샌드위치’ 구도가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가 관세와 투자 압박이 동시에 작동하는 첫 전략 시험대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근본적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조치 목적은 반도체 제조 시설을 미국에 짓게 하려는 압박”이라며 “직접적인 고율 관세가 아니더라도 투자 유인과 규제를 병행하는 방식으로 여러 카드가 동원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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