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로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인공지능(AI) 산업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괴물 칩(monster chip)’으로 규정하며 생산 확대와 함께 새로운 에너지원 확보의 시급성을 거듭 강조했다. AI 인프라 수요 폭증이 메모리 시장의 왜곡과 글로벌 산업 구조 재편을 동시에 초래하고 있다는 진단도 내놨다.
최 회장은 20일(현지시간)부터 이틀간 미국 워싱턴 DC에서 최종현학술원이 주최한 제5회 트랜스 퍼시픽 다이얼로그(TPD) 환영사에서 “우리(SK하이닉스)는 더 많은 몬스터 칩을 만들어야 한다”며 “요즘 이 몬스터 칩이야말로 우리 회사에 진짜 큰돈을 벌어다 주는 제품”이라고 말했다. SK하이닉스의 주력 제품인 HBM을 두고 “가장 진보된 기술”이라고 평가하면서다.
HBM은 D램 칩을 수직으로 쌓아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에 높은 대역폭을 공급, 연산 성능을 극대화하는 메모리 기술이다. 최 회장이 이날 언급한 제품은 16개 칩을 적층한 최신 HBM4(6세대)로, AI 학습·추론용 서버에 필수적인 부품이다. 시장에서는 HBM의 마진율이 약 6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그는 AI 기업들의 수요 폭증이 예상 밖의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 회장은 “HBM의 부족 현상(shortage)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며 “HBM의 마진은 60%인데, 일반 칩의 마진은 80%다. 이것이 하나의 왜곡(distortion)”이라고 말했다. AI 인프라가 메모리칩을 ‘모두 흡수’하면서 비(非) AI용 메모리 공급이 줄고, 이 과정에서 마진 역전 등 시장 구조에 왜곡이 발생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AI 기업들의 수요 대비 공급량이 올해도 30% 넘게 부족하다”며 “이러한 부족 현상이 세계의 산업 구조를 완전히 다르게 바꾸고 있다”고 진단했다. PC 업체와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예전만큼 애플리케이션을 내놓지 못하고, 일부는 사업을 접을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가격과 마진 변동성이 커진 만큼 실적 전망도 극단적인 폭을 보일 수 있다고 내다봤다. 최 회장은 “이처럼 변동성이 크기 때문에 SK하이닉스의 올해 영업이익에 대한 시장의 새로운 예상치는 1천억 달러를 넘을 수도 있다”며 “하지만 이는 1천억 달러의 손실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AI 호황이 ‘슈퍼 호실적’과 ‘대규모 손실’ 가능성을 동시에 내포한 양날의 검이라는 취지다.
AI 인프라 확장과 함께 에너지 문제는 또 다른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최 회장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AI 산업이 필연적으로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한다며 “우리는 AI 데이터센터와 발전소를 함께 짓는, 새로운 솔루션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전력 수요를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재난이 될 것”이라며 “에너지는 또 하나의 큰 문제이자, 사회 전체의 큰 도전”이라고 강조했다.
행사 후 기자들과 만나서도 그는 “AI 인프라를 만들려면 에너지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이 됐으니 뉴 에너지의 소스(신 에너지원)가 필요하다”며 “그걸 만들어내는 계획을 장기적으로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데이터 센터를 만들려면 다 기가(giga) 단위의 일”이라며 “데이터센터 하나에 원자력 발전소 하나씩 매치해야 할 정도”라고 표현해, AI 시대 전력 인프라의 규모와 중요성을 부각했다.
SK가 미국에 설립을 추진 중인 ‘AI 컴퍼니’(가칭 AI Co.)에 대해서는 “경쟁력 있는 데이터센터 테크놀로지가 계속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추진하는 투자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체 연구개발(R&D)도 당연히 할 것”이라면서도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R&D의 종류가 따로 있고, 미국의 시스템이나 특정 기술 분야는 미국에서 수행하는 게 좋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인디애나주에 짓고 있는 ‘어드밴스드 패키징 팹’ 역시 “사이즈가 큰 것은 아니다”라며 “R&D 중심으로 돌아갈 상황이 훨씬 크다”고 내다봤다.
지정학과 기술 패권 경쟁이 얽힌 현 상황에 대한 평가도 내놨다. 최 회장은 TPD의 취지와 관련해 “지정학은 정치의 문제이자, 기술 자원의 문제이고 사람의 문제”라고 규정했다. 이어 “우리가 직면한 힘들은 더 이상 단순한 도전이 아니라 우리의 생존을 규정하는 구조적 현실이 됐다”며 “거센 움직임의 시기에는 가장 강한 존재가 아니라 가장 잘 적응하는 존재가 살아남는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를 “많은 이들이 ‘뉴노멀’(New Normal)이라고 부르는, 구조적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진단하며 “이 전환기에 한·미·일 3국이 어떻게 협력하느냐가 앞으로의 질서를 결정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전 세계 산업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AI를 중심으로 한 3국 협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편 미·중 갈등과 통상 환경 변화와 관련한 질문에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 부과 조치에 대해 미 연방대법원이 위법 판결을 내린 데 대한 견해를 묻자 “판결문을 보고 나중에 한 번 말씀드릴 수 있는지 보겠다”고 답했다. 대만이 TSMC의 대미 투자액에 따라 관세를 낮추기로 한 미·대만 무역 합의에 대해서도 “(대법원 판결 등) 이 얘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다 보고 난 다음에 결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미 간 무역·안보 분야 ‘조인트 팩트시트’ 발표 이후 투자 이행을 둘러싼 세부 협상이 진행 중인 데 대해선 “코리아가 원팀이 돼서 이런 문제들을 잘 소화할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한 체제인 것 같다”고 언급했다. AI와 에너지, 지정학이 얽힌 복합 위기 속에서 한국 기업과 정부, 동맹국 간의 공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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