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최근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SNS에 태극기 이모티콘과 함께 한국 반도체 엔지니어 채용 공고를 공유하며 한국 인재 영입에 나섰다. 자율주행과 휴머노이드 로봇에 적용될 자체 AI 칩 개발을 가속하기 위한 행보로, 글로벌 반도체·AI 경쟁이 기술·설비 중심에서 핵심 인력 확보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받아들여진다.
이 같은 움직임은 특정 기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엔비디아를 비롯해 구글, 브로드컴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도 고액 연봉과 주식 보상을 앞세워 한국 반도체·AI 인재 영입을 확대하고 있다. AI 반도체 기술을 자체 확보하고 공급망 안정성을 강화하려는 중장기 전략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한국 메모리 양대 축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성과급 확대와 연구 환경 개선 등으로 인재 이탈 방어에 나섰다. SK하이닉스는 연간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 재원으로 배정하고 상한제를 폐지, 삼성전자도 성과 중심 보상과 연구 인프라 개선을 강화하고 있다. 다만 글로벌 기업들이 제시하는 보상 수준과 연구 조건을 고려하면 국내 기업들의 대응 여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대기업보다 인력 기반이 취약한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들은 1~3년 차 엔지니어 이직률이 대기업의 두 배 이상으로 집계됐다. 산업통상자원부 반도체 인력 통계에 따르면, 초기 경력 인력이 빠르게 빠져나가면서 중소 소부장 기업은 숙련 인력을 내부에서 축적하기 어려운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
지난 세미콘 코리아 현장에서는 도쿄일렉트론(TEL), ASM 등 글로벌 장비사 부스에 연장근로 수당과 복지 조건을 확인하려는 예비 엔지니어들이 몰린 반면, 국내 중소 소부장 기업들은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호소했다. 어렵게 키운 숙련 인력이 대기업이나 해외 기업으로 빠져나가는 구조가 반복, 국내 반도체 생태계의 ‘허리’가 먼저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내에서는 반도체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2026학년도 정시 모의지원 결과 주요 대학 반도체 계약학과 지원은 전년 대비 50% 이상 증가했고, 경쟁률도 30대 1을 넘어섰다. 컴퓨터·SW 계열 지원이 감소한 것과 대조적이다. 4대 과기원에서 의·치대 진학을 이유로 자퇴한 학생 수도 1년 새 절반 가까이 감소. 최상위권 학생들의 진로 선택이 반도체 분야로 집중되는 양상이다.
다만 지표를 종합하면 이공계 인력 기반이 구조적으로 개선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난해 5개 대학 반도체학과 등록 포기율은 179%에 달했고, 서울대 공대의 경우 입학 정원 850명 가운데 100명 이상이 1학년 때 의대 재도전을 위해 학교를 떠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2030 연구개발 인력의 70%가 3년 내 해외 이직을 고려한다는 조사도 나왔다. 글로벌 100대 AI 인재 가운데 한국인은 1명에 그치며, 인재를 길러도 붙잡지 못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취약한 고리는 인재에만 그치지 않는다. 생산 공정 역시 수도권 남부에 과도하게 집중돼 있다. 대만의 TSMC가 지진과 지정학 리스크에 대비해 복수 거점으로 생산을 분산한 것과 달리, 한국은 용인·평택 등 특정 지역에 생산 능력이 집중. 전력망 사고나 대형 재난이 발생할 경우 국가 산업 전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반복된다. 과거 대기업 투자 과정에서 수도권 규제가 일부 완화, 이에 균형발전 기조와 수도권 투자 확대 사이의 정책 일관성을 둘러싼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지방에는 이미 작동 가능한 생태계가 존재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경북 구미는 반도체 50년 축적과 300곳이 넘는 소부장 기업을 기반으로 팹 유치를 요구하고 있다. SK실트론, LG이노텍 등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이 집적돼 있고, 2030년 개항 예정인 대구경북 신공항을 통한 항공 물류 경쟁력도 강점으로 제시된다. 그럼에도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는 정책 방향은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상태다.
정부는 AX대학원 확대, 반도체 마이스터고 전환, 1조원 규모 AI반도체 공동개발, 2조원 특별회계 신설, 국산 NPU 실증·상용화, 파운드리 접근성 개선, 팹리스 전용 펀드 조성 등 정책 패키지를 추진하고 있다. 교육·R&D·금융 지원을 포괄하는 대응이다. 정책이 대학원·고교 중심의 인재 양성과 산업 저변 확대에 집중됐지만,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즉시 투입 가능한 설계·아키텍처급 인력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는 모습이다.
국가과학자 100명 선정 등 인재 육성 정책도 추진되고 있다. 다만 산업 생태계, 연구 환경, 기업 경쟁력 등과의 연계 효과에 대해서는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AI 시대 반도체는 산업 경쟁력과 국가 안보 측면에서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현재 정책은 인력 양성과 산업 기반 확충에 무게가 실려 있으며, 사람·공정·지역을 포괄하는 종합적 설계에 대해서는 추가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최근 간담회에서 “AI 시대 반도체는 산업 경쟁력과 국가 안보를 동시에 좌우하는 핵심 전략자산”이라며 “정부는 선언이 아니라 정책·예산·제도로 AI 반도체 산업 성장을 뒷받침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업계에서는 정책 추진과 별개로 산업 현장의 구조적 과제도 병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교육과 연구개발 지원을 넘어 연구 환경과 보상, 공정 분산, 지역 정착 여건까지 함께 마련되지 않으면 인재 유출과 생태계 약화 흐름을 되돌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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