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컬처 리포트] 피로 사회가 키운 ‘힐링’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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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컬처 리포트] 피로 사회가 키운 ‘힐링’의 역설

뉴스컬처 2026-02-22 11:00:3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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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번아웃과 과로, 경쟁과 고립이 일상이 된 시대다. ‘열심히’보다 ‘버티기’가 미덕처럼 소비되는 한국 사회에서, K콘텐츠는 유독 ‘힐링’을 전면에 내세운다. 치유, 위로, 회복, 쉼. 이 단어들은 이제 하나의 장르이자 산업의 전략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힐링이 강해질수록 사회의 피로도 또한 선명해진다는 역설이다. 우리는 어쩌다 위로 없이는 하루를 건너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을까.

사회학자들은 오늘의 한국을 ‘피로 사회’로 진단한다. 성과 중심주의, 초연결 네트워크, 자기계발의 강박은 개인을 끊임없이 증명하도록 몰아붙인다. 직장인은 KPI와 인사고과에 시달리고, 청년은 스펙과 포트폴리오를 쌓느라 쉼을 잃는다. SNS 속 타인의 성취는 또 다른 비교의 압박이 된다. 피로는 단지 육체적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과 존재 가치의 위기에서 비롯된 감정의 소진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등장한 K콘텐츠의 ‘힐링 코드’는 일종의 문화적 처방전처럼 기능한다. 느린 호흡의 예능, 일상의 온기를 강조하는 드라마, 자연과 손맛을 전면에 내세운 다큐멘터리는 공통적으로 “괜찮다”고 말한다. 경쟁 대신 관계를, 속도 대신 체온을 강조하는 서사는 피로한 사회가 갈망하는 대안적 감각을 제공한다.

삼시세끼 Light'. 사진=tvN
삼시세끼 Light'. 사진=tvN

예컨대 tvN '삼시세끼'는 도시의 시간표를 벗어난 자급자족의 리듬을 보여주며 ‘느림의 미학’을 대중화했다. 출연자들이 밥을 짓고, 불을 피우고, 수확한 재료로 식탁을 차리는 장면은 거창한 사건 없이도 충분히 서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을 소비하는 새로운 감각의 탄생이었다.

드라마 영역에서도 힐링은 주요 문법이 되었다. '나의 아저씨'는 상처 입은 인물들이 서로의 삶을 견디게 하는 과정을 통해, 화려한 성공 대신 ‘버티는 존엄’을 이야기했다. 인물들은 완벽하지 않았고,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는 작은 숨구멍이 된다. 시청자들은 그 틈에서 자신의 피로를 겹쳐 보았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고강도 노동의 상징인 병원을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인물들의 우정과 음악, 소소한 식사 장면을 통해 일상의 온기를 복원했다. 역설적으로 가장 치열한 공간에서 가장 따뜻한 정서를 길어 올린 셈이다. 이는 ‘피로 사회’의 한복판에서도 인간적 유대가 가능하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읽힌다.

글로벌 시청자를 사로잡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경쟁적 법정 드라마의 외피를 두르면서도, 다름을 인정하는 세계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자극적 갈등보다 공감의 서사가 더 큰 파급력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힐링은 더 이상 국내 시장에 국한된 코드가 아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배우들. 사진=정경호 인스타그램
'슬기로운 의사생활' 배우들. 사진=정경호 인스타그램

여기서 성찰은 더 깊어진다. 힐링 콘텐츠의 확산은 사회의 상처를 실질적으로 덜어내고 있는지 아니면 잠시 통증을 완화하는 감정적 장치에 머무르고 있는지. 콘텐츠 속 자연과 밥상, 우정과 음악은 스크린 밖 현실을 바꾸지 않는다. 시청자는 위로를 얻지만, 다음 날 다시 경쟁의 장으로 돌아간다. 힐링은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감정 관리로 환원시키는 위험을 내포한다.

그러나 동시에, 힐링은 문화적 저항의 언어이기도 하다. 속도를 강요하는 체제에 맞서 ‘느림’을 소비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선택이 된다. 과도한 성취 담론에 균열을 내고, ‘잘 사는 법’ 대신 ‘잘 쉬는 법’을 말하는 콘텐츠는 가치의 전환을 촉구한다. 이는 도피가 아니라 감각의 재교육에 가깝다.

K콘텐츠의 힐링은 종종 ‘관계’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서구의 개인주의적 치유 서사가 자아의 회복에 방점을 찍는다면, 한국적 힐링은 공동체적 체온을 강조한다. 함께 밥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서로의 상처를 묻지 않으면서도 곁에 있어 주는 장면들. 이는 가족주의의 변주이자, 고립된 도시인의 욕망을 반영한 문화적 징후다.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힐링의 상업화다. ‘힐링’은 이제 프로그램 기획서의 키워드이자, 관광·식음료·출판 산업과 결합한 브랜드가 되었다. 촬영지 투어, 레시피 상품화, OST 음원 소비까지 이어지는 확장성은 피로를 자본의 언어로 재가공한다. 치유마저 시장의 논리 안에서 유통되는 풍경은, 현 시대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반복해서 힐링 콘텐츠를 찾는다. 이는 유행이 아니라 시대 감수성의 반영이다. 고강도 압박 속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전지대를 탐색한다. 스크린 속 장면은 현실을 대체하지 못하지만, 잠시 숨을 고르게 하는 완충지대가 된다. 그 짧은 정지의 순간이 다음 하루를 버티게 한다.

결국 K콘텐츠 속 힐링과 피로 사회의 관계는 일종의 공생 구조에 가깝다. 피로가 깊어질수록 힐링은 더욱 정교해지고, 힐링이 정교해질수록 우리는 피로의 실체를 더 또렷이 인식한다. 이는 단선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비추는 거울 같은 관계다. 힐링은 피로의 그림자이자, 동시에 그 존재를 증명하는 빛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사진=에이스토리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사진=에이스토리

문화는 사회의 체온을 기록하는 장치다. 오늘의 K콘텐츠가 반복해서 쉼과 위로를 말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만큼 지쳐 있다는 집단적 고백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힐링을 소비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 일이다. 스크린 속 느림과 온기가 현실의 제도와 구조를 향한 질문으로 확장될 수 있을지 성찰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치유는 감정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상상력이 된다.

피로 사회를 견디는 방법은 각자 다르다. 누군가는 자연을 찾고, 누군가는 드라마 속 인물에게 자신을 투영한다. K콘텐츠의 힐링은 다양한 숨구멍 중 하나다. 다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진짜 쉼은 콘텐츠 밖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스크린이 건네는 위로를 디딤돌 삼아 사회의 속도를 다시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것이 이 시대 문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또 하나의 과제일지 모른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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