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 애플페이와 페이스페이 등 신결제 서비스가 국내 금융 생태계의 판도를 흔들면서, 결제 시장의 헤게모니가 전통 금융권에서 플랫폼 기업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빅테크가 사용자 접점을 장악하며 결제 전면에 나서는 사이, 과거 시장을 호령했던 카드사들은 대형 플랫폼과의 제휴에 미온적이거나 제한적인 역할에 머무는 등 이른바 ‘관망 모드’를 유지하고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애플페이의 국내 상륙과 생체인증 기반 결제 서비스인 ‘페이스페이’의 확산 과정에서 주요 카드사들의 참여는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현재 애플페이는 현대카드가 국내 도입을 주도하며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현대카드가 초기 도입 비용과 높은 수수료 부담에도 불구하고 ‘MZ세대 유입’과 ‘브랜드 이미지 선점’이라는 실익을 챙긴 것과 달리, 나머지 대형 카드사들은 실무 협의 단계에서 멈춰 선 상황이다.
플랫폼 기업들이 공격적으로 세를 확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카드사는 수익성 악화와 데이터 주도권 상실 등을 이유로 협상 테이블에서 신중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결제 시장의 주도권이 단순 ‘결제 수단’을 제공하는 금융사에서, ‘사용자 경험’을 설계하는 기술 기업(Big Tech)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과도기적 현상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플랫폼 종속될라…카드사가 ‘화이트 라벨러’ 우려하는 이유
글로벌 플랫폼의 결제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운영 주체가 플랫폼 기업이다. 이 구조에서 카드사는 결제를 처리하는 ‘파이프라인’ 역할에 그치게 된다는 분석이다. 서비스 기획부터 고객 UI/UX 개발, 결제 데이터 관리 권한이 모두 플랫폼에 집중되다 보니, 카드사 입장에서는 자사 브랜드 노출이 줄어드는 ‘화이트 라벨러(White Labeler·단순 제조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수수료 체계는 카드사들이 선뜻 손을 잡지 못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현재 현대카드가 애플 측에 지불하는 것으로 알려진 건당 수수료는 타사들이 감내하기 어려운 ‘역마진’ 임계점에 맞닿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카드업계 관계자는 “신결제 플랫폼 도입 시 발생하는 추가 수수료와 마케팅 비용을 카드사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구조가 부담”이라며, “가맹점 수수료 인하 압박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플랫폼 통행료까지 지불하게 되면 수익성이 제로(0)에 수렴할 수도 있다”고 토로했다.
“인프라는 여전히 카드사지”…‘결제 고속도로’로서의 생존 전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카드사의 영향력이 단기간에 쪼그라들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수십 년간 구축해온 수천만 명의 고객 기반과 전국 단위 가맹점 네트워크, 그리고 강력한 신용 공여 기능은 플랫폼 기업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철옹성’이기 때문이다.
특히 복잡한 정산 시스템과 부정 사용 방지(FDS) 등 리스크 관리, 소비자 보호 체계는 금융당국의 엄격한 규제를 받는 카드사만의 전문 영역이다. 이 때문에 결제 시장이 플랫폼 중심으로 재편되더라도 카드사는 이른바 ‘결제 고속도로’를 관리하는 인프라 제공자(Provider)로서의 존재감을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최근 삼성카드 등 대형 카드사들이 자체 앱(App)을 ‘종합 금융 플랫폼’으로 고도화하는 작업에 나선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디지털 화폐 기반 결제 등 새로운 영역에서 카드사의 역할이 확대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결제 시장 ‘전환기’… 전문가 “역할 재정립 불가피”
금융 전문가는 현재를 국내 결제 산업의 거대한 전환기로 규정한다. 카드사가 시장의 주인공이었던 시대에서, 플랫폼이 앞단(Front)을 점유하고 카드사가 뒷단(Back)을 지탱하는 ‘기능적 분화’가 가속화될 것이라는 진단이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현재 국내 결제 시장은 카드수수료 인하 압력과 소비 심리 위축으로 기존 수익 모델이 흔들리는 위기 상황”이라고 진단하며 “플랫폼 제휴는 양날의 검으로 볼 수 있다. 이제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사업을 통해 결제 비용 절감과 디지털 주권 확보에 직접 나설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카드사는 이미 수천만 명의 고객과 가맹점을 연결하는 최적의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어 스테이블코인 사업의 최적 주체”라며 “여신전문금융업법을 신속히 개정해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카드사의 부수 업무로 제도화하고, 카드사 컨소시엄을 통한 시범 사업으로 실효성을 검증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서울 소재 대학의 한 경제학과 교수도 “결제 시장의 주도권이 플랫폼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탄탄한 인프라 없이 결제 생태계는 유지될 수 없다”며, “카드사가 특정 플랫폼에 종속되기보다는 스테이블코인과 같은 블록체인 기술을 자사 앱에 결합해 실시간 정산과 수수료 절감을 구현하는 등 직접적인 생태계 리더로 재도약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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