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신연수 기자 | 미국 연방 대법원이 20일(현지시간)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근거한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가 위법이라고 판단했다. 다만 한국 등 주요 무역 상대국들이 거액의 대미투자와 함께 맺은 무역합의는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를 지낸 웬디 커틀러 아시아소사이어티정책연구소(ASPI) 부회장은 이날 연합뉴스에 보낸 논평에서 “최근 몇 달간 발표된 합의에서 손을 떼는 것은 아시아 지역 무역 파트너들의 선택지에 없을 것”이라며 “그들은 그러한 조치가 백악관과의 관계에서 불리한 입장으로 이어질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커틀러 부회장은 “무역 파트너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근거로 IEEPA를 사용할 때 직면한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며 “그럼에도 그들은 미국이 관세 유지를 위해 다른 법률을 활용할 것이란 확신을 심어주자 미국과의 거래 체결을 선택했다”고 강조했다.
중국과 관련해서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체결한 1단계 무역 합의 이행 여부에 대해 USTR이 무역법 301조에 입각한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언급하면서 “이는 상호관세 무효화 이후 중국에 대한 백업 계획의 주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톰 래미지 한미경제연구소(KEI) 경제정책 분석관도 “이번 판결이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무역 정책 종말을 의미하진 않는다”라며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 합의에서 발을 빼는 국가를 대상으로 어떤 형태든 보복적 본보기를 만들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그는 “이에 따라 IEEPA 관세 하에서 중대한 거래를 체결한 한국 등 무역 파트너들은 미 행정부가 다음 행보를 모색하는 동안 관망 자세를 취하는 게 현명한 방법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다수의 무역 합의는 유효하다”고 강조했고 유효하지 않은 일부 합의는 다른 합의로 대체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은 상호관세 철폐 시 트럼프 대통령의 품목별 관세가 적용되는 자동차, 철강, 알루미늄 등을 제외하고 무관세로 돌아갈 수 있지만, 오히려 불확실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는 지난달 “트럼프 대통령이 다른 수단을 통해 관세를 유지하려 한다면 이재명 정부에 어느 정도 동맹의 안정성을 제공했던, 고된 협상 끝에 체결된 협정에 더 큰 불확실성을 초래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이어 “조선업이나 핵 추진 잠수함을 포함한 협정의 다른 가치 있는 측면까지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전임 조 바이든 정부에서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수석보좌관을 지낸 마사 김벨 예일예산연구소 소장은 이번 판결로 무역 관련 정책 불확실성이 가중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작년 4월로 돌아간 셈”이라며 “지난해 경제를 둘러싸고 우리가 겪었던 모든 불확실성이 다시 돌아왔다”고 말했다.
로버트 랩슨 전 주한미국 대사대리도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주장한 것과 달리 앞으로 불확실성과 위험이 증가할 것”이라며 “결코 더 안정적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랩슨 전 대사대리는 “한국 정부는 이미 이 같은 연방 대법원 판결과 트럼프 행정부의 예상 대응 포함 다양한 시나리오를 검토했을 것으로 짐작한다”며 “장·단기적으로 자국의 우선 이익에 부합하는 경로를 신중하게 선택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그는 앞으로 이번 연방 대법원 판결이 한미 간 무역 합의에 따른 대미투자 합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가 관심사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우리 수출 기업들이 미 대법 판결로 그동안 부담했던 관세를 돌려받을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전문가가 부정적인 의견을 내놨다.
래미지 분석관은 “이번 판결이 관세 납부자들이 환급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관세는 수입업자들이 직접 냈기 때문에 환급 문제는 미국에 기반을 둔 수입업자들에게 더 큰 쟁점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수입업자들에 대한 관세 환급도 최소 수개월에서 최대 수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면서 “당장 환급이 이뤄질 것이란 기대는 접는 게 좋다”고 덧붙였다.
랩슨 전 대사대리도 “한국 기업들이 법적·제도적 수단을 통해 이 문제를 다룰 수는 있다”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11월 중간선거에서 정치적 부담이 될 수 있음에도 관세를 환급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아울러 전문가들은 상호관세 철폐가 미국 경제에도 복합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견해를 내보였다.
단기적으로 관세로 납부해야 할 돈이 시장에 풀려 재정 부양책 효과를 내 기업 실적이 개선되는 등 경제와 증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장기적으로는 정부 재정 악화로 이어져 증시에도 마이너스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호세 토러스 인터랙티브 브로커스 수석경제학자는 “관세 환급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기업 실적이 단기적으로 좋아져 순이익이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회계 컨설팅업체 RSM US의 조셉 브루셀라 수석경제학자는 “중소기업 특히 소매·제조업 분야에 확실히 긍정적”이라며 “이들은 상품 가격 상승 속에서 시장점유율 유지를 꾀하는 대기업 중심 공급망 내에서 마진 축소라는 부담을 감내해 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나이키를 비롯한 의류 기업과 페덱스·UPS 등 물류기업, 원자재 수입 기업 캐터필러·디어 등이 관세 환급 혜택을 볼 것으로 예견했다.
다만, 이 같은 관세 환급과 세수 감소는 정부 재정 악화를 촉발할 수 있다. 펠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 기반을 둔 연구소 ‘펜-와튼 예산 모델’은 관세 환급 규모가 1750억달러(약 254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자산관리회사 오자이크(Osaic)의 필 블랑카토 수석 시장 전략가는 “재무부가 기업들에 상당한 금액을 상환해야 할 것이란 우려로 채권 금리가 급등했다”며 “이는 재정 적자 확대화 미국 국가 신용등급 하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국채 금리가 올라가면 주식시장의 유동성이 채권시장으로 이동하면서 증시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역점을 두고 있는 미국 제조업 부활과 고용시장 영향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상반된 견해가 나왔다.
토러스 수석경제학자는 “관세가 사라지면 제조시설의 미국 내 유치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며 고용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거시경제 컨설팅업체 ‘액세스/매크로’의 가이 버거 노동시장 수석고문은 “세금이 줄면 재정 부양 정책 효과를 내 노동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분석했다.
다만 연방 대법원 판결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다른 수단을 통해 관세를 재부과할 수 있다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무역법 122조에 근거해 전 세계에 10%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다이앤 스웽크 KPMG 수석 경제학자는 “백악관은 부정적인 결과에 대비해 왔다”며 “금융시장은 관세 철폐 소식에 반등했지만 이는 시기상조”라고 경고했다.
USTR 법률고문을 지낸 피트릭 칠드레스 로펌 홀랜드앤나이트 파트너 변호사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다. 며칠에서 몇 주 정도 걸릴 수 있겠지만 몇 달까지 걸리지는 않을 것”이라며 “트럼프 행정부가 다른 법적 권한을 활용해 IEEPA 관세 체계 전부 혹은 상당 부분을 재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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