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엔 시집이 베스트셀러 1∼3위…IMF 구제금융 땐 위로·희망 주는 책 주목
2000년대 일본문학 인기…지난해는 한국문학·AI·주식 관련 도서가 대세
(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서점의 베스트셀러나 도서관의 대출 순위 상위 책은 그 시기의 시대상이나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 중 하나다.
지난해 상반기에는 6월3일 대통령 선거로 인해 정치·사회 분야 도서가, 하반기에는 코스피가 1980년 출범 이후 처음으로 4,000선을 돌파한 영향으로 주식 등 경제·재테크 도서가 각각 주목받았다. 2024년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여파가 이어지면서 한국문학은 지난 한 해 꾸준히 독자들의 선택을 받았다.
베스트셀러와 공공도서관 대출 순위 등에 나타나는 시기별 인기 도서와 시대상을 살펴봤다.
◇ 2025년 한강 소설 등 한국문학 대세…AI 서적도 인기
지난해 공공도서관 1천583곳의 총대출량 1억4천만건 중 약 25%(3천461만건)가 한국 문학이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따르면 이같은 한국문학 대출량은 2014년 빅데이터 분석을 시작한 이래 최고치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 대출이 6만504건으로 1위를 차지한 것을 비롯해 '채식주의자'(5만8천건)가 2위, '작별하지 않는다'(4만6천건)가 3위에 오르는 등 상위 1천권 가운데 한강 작품이 17권 포함됐다.
양귀자의 '모순'은 1998년에 출간됐음에도 지난해 대출 순위 6위를 차지했다.
비문학 부문 대출 상위 1천권 중에는 경제·금융 분야 도서(33.3%)가 가장 많았고 가정·건강(13.3%), 심리(9.5%) 도서가 뒤를 이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작년 국민 독서 트렌드에 대해 "한 작가의 초기작과 신작이 동시에 대출 상위권에 오르며 '믿고 읽는 작가' 중심으로 한국 문학 인기가 확산했다"고 분석했다.
이어 "비문학 부문은 경제적 안정에 대한 관심과 함께 건강한 삶과 내면의 균형을 중시하는 사회적 흐름이 독서 트렌드에 반영됐다"고 덧붙였다.
비문학 부문에서는 특히 AI 활용이 화두가 되면서 전산 관련 도서 대출량이 지난해 51만여건으로 전년보다 21.1% 증가했다.
서점에서도 한국문학의 인기가 확인됐다.
지난해 교보문고와 예스24의 베스트셀러 순위에서는 모두 '소년이 온다'가 1위를 차지했다. 예스24에서는 종합 100위권 중 21권이 소설·시·희곡 장르였다.
교보문고는 지난해 도서 관련 주요 동향으로 상반기에는 정치, 하반기에는 경제 부문에 관심이 쏠린 점, AI 관련 도서가 이론서에서 활용서로 변화한 점 등을 꼽았다.
류영호 교보문고 부장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웹진 'K-Book Trends'에 기고한 '한국 출판시장의 2025년 동향과 2026년 전망'을 통해 "2025년은 한국문학이 다시 한번 독자들의 정서와 사회적 상상력을 견인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큰 해였다"고 평가했다.
이어 "양귀자의 모순이 27년 만에 베스트셀러 순위 상단으로 올라 교보문고 종합 2위를 기록한 사례는 고전급 텍스트가 새로운 세대의 현실과도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이 기고문에 따르면 교보문고에서 AI 관련 도서 판매량은 전년 대비 68.5% 성장했다. 대선을 앞뒀던 지난해 5월에는 정치·사회 부문 도서 판매량이 93.2%, 11월에는 주식 관련 도서 판매량이 99.3% 증가했다.
◇ 1970∼1990년대 시대별 인기도서 특징은
과거에는 어떤 도서가 인기였을까.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1970년대에는 교양·계몽·번역 문학이 인기였다.
박경리의 '토지'와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 고전 번역서인 '삼국지' 등이 꼽힌다. '별들의 고향'은 1972∼73년 조선일보 연재 후 1973년 단행본으로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됐고 1974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토지도 1979년 드라마로 방송됐다.
삼국지는 1970년대 여러 번역서가 나왔다. 고우영의 만화로 1978∼1980년 스포츠신문에서 연재됐고 1980년에는 아동용 애니메이션도 나왔다.
1970년 창간한 월간 교양지 '샘터'는 1990년대 초까지 월 판매 부수가 50만부일 정도로 '국민 잡지'였다.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고 사회가 격변하던 1980년대는 조정래의 '태백산맥', 황석영의 '장길산',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등 민중·역사 중심 서사가 인기였다.
동시에 시집 중심의 감성 문학도 주류를 이뤘다.
교보문고가 발표한 1988년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를 보면 서정윤의 '홀로서기',에리히 케스트너의 '마주 보기',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등 시집 3권이 상위 1∼3위를 석권했다.
당시 사회과학 부문 1위는 '주식투자 성공학'이 차지했고 '초보자를 위한 주식투자 해설', '증권투자 100문100답'도 많이 팔렸다. 1980년대 후반 주식 열풍이 불었기 때문이다.
교보문고가 집계한 1990년대 전체 베스트셀러 1위는 잭 캔필드의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기를 전후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는 내용이 독자들을 사로잡은 것으로 보인다.
2위에 오른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 역시 시한부 인생을 사는 40대 후반 중년 가장의 가족 사랑을 담은 작품으로, 명예퇴직과 감원이 잇따른 사회적 분위기가 책 인기에 반영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 2000년 이후 독서는…일본 서적, 한국 문학에 밀려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는 1989년 한국에 번역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시작으로, 일본 소설이 크게 인기였다. 도시화·개인화가 가속하는 가운데 현대인의 내면과 공허함을 다룬 점이 인기의 요소로 분석된다.
김춘식 동국대 국문과 교수는 2007년 문예지 '문학수첩'에 실은 '동아시아문화의 상업적 연대와 하루키 현상'이라는 글을 통해 "하루키의 영향력은 고도 자본주의적 일상 속에서의 개인의 감수성을 적절하게 그려내고 있는 가벼운 문체의 힘, 그리고 그 가벼움의 다른 한편에 존재하는 존재에 대한 무겁고 심각한 탐색, 매력적인 상징성 등에 있다"고 평가했다.
2009∼2010년 국내에 출간된 하루키의 '1Q84'(전 3권)는 출간 직후 일본 도서로는 처음으로 국내 베스트셀러 종합순위 1위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1Q84' 1권은 교보문고의 2006년∼2015년 10년간 소설 누적 판매량에서도 3위를 차지했다. 누적 판매량 중 10위권 안에는 일본 작가 작품 중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4위)과 '공중그네'(10위)도 포함됐다.
2019년 7월에는 이른바 '노재팬'(No-Japan) 운동이 한창이었는데도 당월 출간된 소설 375종 가운데 78종(20.8%)이 일본 작품이었다.
그러던 일본 도서의 인기는 2020년대 들어 'K-문학'에 자리를 내주며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2016년 출간된 조남주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100만부 이상 팔렸고 2019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한국문학 인기의 핵심에는 한강이 있다. '채식주의자'로 2016년 5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으며 주목받은 그는 2024년에는 한국 작가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 책의 경우 교보문고 등의 지난해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일본 승려 고이케 류노스케의 '초역 부처의 말'(6위)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noano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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