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었음' 청년이 늘고 있는 가운데 일부 청년들 사이에선 하루 종일 게임을 돌리고 아이템과 게임머니를 팔아 생활비를 버는 이른바 '쌀먹'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노동은 있지만 경력은 남지 않고, 생산은 있지만 현실 경제로는 축적되지 않는 '게임 속 노동'이 한국 고용시장 밖의 새로운 회색지대를 만들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엔씨소프트가 최근 출시한 게임 '리니지 클래식'에선 벌써부터 작업장과 외부 거래가 폭증하고, 희귀 아이디가 수천만 원에 거래되는 투기판까지 벌어지며 '쌀먹(게임 아이템 판매로 생계를 잇는 행위)'의 상징처럼 굳어지는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 엔씨소프트는 정책 위반에 대한 강력 제재를 예고하지만 정작 게임의 설계와 운영이 돈이 되는 통로를 열어주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20일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지난달 15~29세 '쉬었음' 청년은 46만9000명으로 1년 전보다 3만5000명 늘었다. 코로나19 대유행 직후였던 2021년 1월 이후 최대치에 가깝다. 실업자와 취업준비, 쉬었음을 합치면 108만9000명으로 15~29세 인구의 13.8%에 달했다.
비경제활동인구 조사에서 쉬었음 청년의 가장 큰 이유는 '원하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움'(31.0%)이었다. 그 다음이 '다음 일 준비'(19.1%), '일자리 없음'(9.3%)이었다. 취업 시장의 문은 좁아지고 기업들이 수시·경력직 채용을 선호하는 흐름이 강화될수록 사회 초년생의 진입장벽은 더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일부 청년들은 위험 대비 보상이 불투명한 노동시장 대신 즉시 현금화가 가능한 대안으로 '쌀먹'을 선택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서울 소재 대학을 졸업한 30대 김상호(가명)씨는 하루의 시작을 출근 대신 컴퓨터 3대로 온라인 게임을 돌리며 시작한다. 게임 속에서 얻은 아이템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많이 벌 때는 한 달에 300만원 가량도 벌지만 매달 수익이 들쭉날쭉하다.
하루 8~12시간의 노동이 게임 속에 투입되지만 경력이나 숙련으로 남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는 '쉰 것과 다르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게임 패치 한 번으로 소득 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정성도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의 취업 시장에서 '당장 현금이 되는 일'은 그 불안정성을 덮을 만큼 강한 유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이 집중되는 게임으로 '리니지'가 다시 지목되는 배경에는 최근 출시된 '리니지 클래식'이 있다. 지난 11일 정식 출시된 리니지 클래식은 희귀 아이디 판매 가격이 수천만 원을 호가했다는 보도가 나오며 시작부터 '투기 논란'이 불거졌다. 사전예약을 통해 선점한 계정 이름을 온라인에서 파는 방식인데 서버와 아이디 희귀도에 따라 수만원대부터 수천만원까지 가격이 붙는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빛이라는 아이디가 '2천만원에 거래가 완료됐다'는 글이 올라올 정도로 거래가 활발하다는 얘기도 나왔다. 일부는 구글 가계정을 대량 생성한 뒤 사전예약으로 계정 이름을 선점하는 '허점 악용' 방식까지 동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니지가 출시되기도 전에 '좋은 이름'이 프리미엄이 되고 그 프리미엄이 현금으로 바뀐 셈이다.
엔씨소프트는 "원칙적으로 모든 계정 거래는 정책 위반이며 적발 시 계정 권한을 정지하고 시도만 해도 이용 제한 처분을 한다"고 설명하지만 시장이 이미 형성된 뒤의 경고는 거래를 완전히 막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이템 거래가 가장 활발한 게임도 리니지다. 국내 최대 아이템 중개 거래 플랫폼 아이템매니아에는 리니지 클래식 관련 물품이 20일 기준 8만1255건 등록됐고 이 중 7만1311건이 실제 거래로 이어졌다. 등록 대비 거래 비율이 88%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게임 아이템과 재화가 수시로 현금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거래가 가능한 배경엔 엔씨소프트의 게임 구조가 지목된다. 하나의 컴퓨터에 다중 클라이언트가 허용되고, 작업장이 사냥터를 장악해도 근본적 차단이 어렵다. 외부거래가 늘어나도 별다른 제재나 조치가 없다보니 게임이 정상적인 플레이보다 돈을 벌기 위한 플레이를 조장한다는 비판마저 제기되고 있다. '쉬었음' 청년이 늘어나는 현실에서 게임이 임시 생계 수단이 되는 현상을 단순히 개인 탓으로만 돌리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쌀먹 청년들이 우후죽순 늘어나는 현상은 한국 고용시장의 경고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게임사가 방치한 구조의 결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위정현 중앙대 교수는 "쌀먹 청년들의 노동은 현실 경제에 남지 않는 '경력 없는 노동'으로 축절된다"며 "'리니지로 먹고 사는' 청년들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엔씨소프트가 내놓아야 할 답은 단속 공지의 횟수가 아니라 돈이 되는 통로를 애초에 차단하는 설계와 운영 원칙이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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