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 추정제'라는 유령이 한국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당최 이게 어디에 써먹는 물건인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건지,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사실상 이재명 정부안에 해당하는 김주영 의원안('25.12.24)을 포함해 22대 국회에 발의된 법안만 벌써 5개에 달한다. (☞'근로자 추정제' 기본 개념 관련 참조 기사 : 스페인·포르투갈판 배민 라이더는 '노동자'인데 한국은 왜 아닌가?)
물 건너 넘어온 '근로자 추정제'
이재명 정부는 '일하는사람 권리 기본법'과 근로자 추정제를 동시 입법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다. 김영훈 장관은 올해 노동절(5.1) 이전 입법을 완료하겠다며 날짜까지 예고한 상태이니, 도대체 이 제도가 뭔지 학습하고 판단해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이 제도의 출발점이 미국과 유럽이라는 점이다. 가장 먼저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 상륙한 것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ABC 테스트를 명문의 법 규정으로 만든 AB5 제도였다. 정혜경 의원안('24.9.23), 이용우 의원안('24.11.6), 박홍배 의원안('25.2.11) 등 이 제도를 거의 그대로 베껴서 발의된 법안만 3개나 된다.
다만 AB5의 경우 입증책임을 사용자에게 전환했다는 점은 '추정제'의 전형을 따르고 있지만, 입증해야 하는 기준은 노동자성 관련 지표가 아니라 자영업자(프리랜서) 관련 지표라는 점에서 유럽 각국에서 벌어지는 법제도 설계와는 구별된다.
유럽연합 플랫폼노동 입법지침(PWD)
유럽연합은 2023년에 플랫폼노동 입법지침(Platform Work Directive)을 만들면서 26개 회원국이 입법할 때 반드시 '고용관계 추정제'를 도입하도록 의무화했다. 다만 각 나라별로 법체계와 노동법 운용 역사가 다르기에 추정제의 구체적 방식에 대해서는 회원국에 일임했다.
처음부터 유럽연합이 구체적 방식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2021년 12월에 제시된 입법지침 초안에서는, 다음과 같이 5가지의 지표(criteria)를 제공하고 이들 중 2가지 이상을 충족하면 '추정(presumption)'이 발동(trigger)될 수 있도록 하였다.
(a) 디지털 노무제공플랫폼이 보수 수준을 사실상 결정 또는 보수 상한선을 설정하는 경우
(b) 노동자가 일할 때 외관, 서비스를 제공받는 고객에 대한 응대 방식 혹은 업무수행에 관한 구속력 있는 규칙을 따르도록 하는 경우
(c) 전자적 수단 등을 통해 업무수행을 감독하거나 일의 결과를 평가하는 경우
(d) 일하는 시간 혹은 일하지 않는 시간을 노동자가 선택할 자유를 제한하거나, 일감(과업)을 수락 또는 수락하지 않을 자유를 제한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하여 노무제공을 하도록 할 자유를 제한하는 경우
(e) 노동자가 서비스를 제공받는 고객을 독자적으로 개척하거나, 다른 제3자를 위해 노무를 제공할 가능성을 사실상 제한하는 경우
위 5가지 기준은 사용자가 플랫폼노동자의 노동자성을 부정하기 위해 입증해야 할 항목과도 일치한다. 즉 5가지 중 2가지 이상을 충족하면 고용관계 추정이 발동되며 입증책임이 사용자에게로 넘어간다. 사용자가 노동자성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위 5가지 조건 중 4가지 이상을 충족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가장 빠른 변화 보여준 스페인 라이더법
2021년에 스페인에 라이더법(Ley Riders)이 제정되어 발효되기에 이른다. EU 입법지침이 확정되기도 전에 가장 먼저 '고용관계 추정'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다만 작동되는 분야는 모든 플랫폼노동이 아니라 음식 배달 및 유통 플랫폼에만 한정된다. (알고리즘 설명 의무는 모든 플랫폼노동에 적용되지만 고용관계 추정은 배달업에만 적용)
이름만 보면 특별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스페인 '노동자법(Estatuto de los Trabajadores)'에 추가조항으로 포함되는 방식이었다. 입법된 조문에 따르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서비스 또는 노동조건을 알고리즘으로 관리함으로써 직접·간접·묵시적으로 조직·지휘·통제의 권한을 행사하는 경우" 해당 플랫폼기업과 음식·물품 배달·배송 노동자 사이 고용관계를 추정하게 된다.
유럽연합 입법지침 초안에 제시된 5가지 지표에 비해서는 훨씬 간소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배달 플랫폼을 통해 일감을 받는 라이더는 거의 100% 고용관계를 인정받을 수 있는 내용이라 가히 '자동 추정(automatic presumption)' 수준이라 볼 수 있다. 이 제도를 통해 스페인 배달업을 주름잡는 글로보·우버이츠 라이더 대부분이 근로계약을 체결하기 시작했다.
몰타 : 추정 발동은 쉽게, 반증은 5가지 기준으로
남유럽의 섬나라 몰타에도 2022년에 고용관계 추정 제도가 도입되었다. 다만 '법률' 형태로 도입된 것은 아니고 '임금 규칙 명령(Wage Regulation Order)'이라는 일종의 하위법령으로 제정되었으며, 음식 배달 및 상품 배송 플랫폼에만 적용되는 특별 규정으로 설계되었다.
독특한 것은 추정의 발동이 매우 간단하다는 점이다. 그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배달 또는 배송 업무를 하고 있으면" 원칙적으로 모두 고용관계를 추정한다. 고용관계가 추정되면 최저임금, 유급휴가, 해고 보호 등 몰타의 고용·노동법상 모든 권리가 보장된다.
추정의 원리상 입증책임은 사용자에게 전환된다. 배달·배송 플랫폼 노동을 하고 있으면 일단 고용관계를 추정하지만, 사용자가 반증에 나설 경우에는 유럽연합 입법지침 초안에 적시된 5가지 기준이 적용된다. 즉, 사용자가 5가지 중 4가지 이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입증해야만 고용관계가 부정된다.
EU 초안에 자체 지표 보탠 벨기에
유럽연합 본부가 위치한 벨기에 또한 2023년 1월부터 고용관계 추정 제도가 시행되었다. 앞선 스페인·몰타 사례에 비해 진일보한 부분은, 배달·배송만이 아니라 디지털 플랫폼이 매개하는 모든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2022년 '노동개혁 패키지법(Labor Deal Act)' 통과로 입법이 완료되었는데, 이 역시 특별법이 아니라 기존 노동법에 조항을 신설하는 방식이었다.
다만 추정을 발동하는 지표 및 사용자의 반증 요건은 좀 복잡하다. 애초 유럽연합 입법지침 초안이 제시한 5가지 지표에 벨기에 현실을 반영한 3가지 지표를 더해 총 8가지 지표가 활용되는데, 초안의 5가지 중 2가지 이상을 충족하거나 전체 8가지 중 3가지 이상을 충족하면 고용관계 추정이 발동된다.
사용자가 반증에 나설 경우에도 5가지 중 4가지 이상 또는 8가지 중 6가지 이상을 충족하지 않는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벨기에가 유럽연합 입법지침 초안에 제시된 5가지 지표 외에 추가한 3가지 지표는 다음과 같다.
➀ 플랫폼 운영자가 자신의 업종에서 우리 플랫폼만 사용할 것 등 '배타성(exclusivity)'을 요구할 수 있는 경우 : 법문에 따르면 '요구할 수 있는 경우' 즉 실제로 배타성이 행사되었음을 입증해야 하기보다 그런 가능성만 부여되어 있어도 인정되는 조건
➁ 플랫폼 운영자가 기본 서비스의 정상 작동 외 목적을 위해 위치정보(geolocation)를 사용할 수 있는 경우 : 특히 위치정보가 성과관리·제재·평가 등 지휘·통제 수단으로 쓰이면 종속적 고용관계를 보여주는 지표가 됨.
➂ 플랫폼 운영자가 업무 수행방식에 관한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경우 : 예를 들어 배달 라이더에게 경로 선택 자유가 없거나 배달 방식을 스스로 정할 수 없는 경우, 또는 플랫폼이 정한 절차에 따라 물건 수령 사실을 보고하거나 수령 시간을 표시해야 하는 경우
포르투갈에 도입된 고용관계 추정제
<인사이드경제>에서 몇 달 전에 소개한 것처럼, 포르투갈은 2023년 5월 1일자로 시행된 노동법 개정으로 추정 제도가 도입되었다. 포르투갈의 경우 6가지 지표를 제시했으며, 이 중 2가지 이상을 만족하면 고용관계 추정이 발동된다. 반대로 사용자가 반증에 나설 경우 6가지 중 5가지 이상을 충족하지 않는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 임금·보수 설정 또는 최소·최대 설정 : 플랫폼이 제공되는 서비스에 대해 보수를 정하거나, 보수에 대해 최소한 혹은 최대한도의 한계를 규정하는 경우
㉯ 업무 지시 및 구체적 규칙 설정 : 플랫폼이 노무제공자의 복장, 서비스 이용자에 대한 태도, 활동 수행 절차 등 구체적이고 정해진 규칙을 설정하고 지시하는 경우
㉰ 업무 수행의 감독 및 품질검사 : 실시간으로 업무가 어떻게 수행되는지 통제·감독이 이루어지거나, 전자적 수단이나 알고리즘 관리 등을 통해 서비스 품질을 확인하는 경우
㉱ 노무제공자의 자율성 제한 : 작업 조직방식, 업무 수행 시간, 과업(task)을 수락하거나 거부하는 능력, 대체자 사용 또는 하청 허용 여부, 고객 선택권 등이 제한되는 경우
㉲ 징계권 또는 계정정지 등의 권한 : 플랫폼이 노무제공자에게 징계 조치를 행사할 수 있거나, 계정을 비활성화하거나 미래 과업 참여를 제한하는 등의 권한이 있는 경우
㉳ 업무 장비 및 도구의 소유 여부 : 업무 장비 및 도구가 플랫폼 소유이거나, 업무 수행에 필요한 도구·장비를 플랫폼이 소유하거나 플랫폼이 임대 형태로 소유·운영하는 경우
6가지 지표 중 첫 5가지는 유럽연합 지침 초안의 5대 지표와 거의 닮았다. 마지막 지표인 '업무 장비 및 도구'의 경우 이를테면 배달 라이더의 오토바이와 휴대폰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라이더가 사용하는 필수적 업무 도구는 '플랫폼과 애플리케이션'이다.
2025년 5월, 포르투갈 대법원 역시 이 조항을 동일하게 보았다. 앱을 만들고 운영하는 절대적 권한이 글로보에 있으니 업무 장비·도구를 플랫폼이 소유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 최대 배달 플랫폼 글로보와 라이더 사이 고용관계를 인정한 판결을 내렸다.
플랫폼자본의 진화를 보여주는 폴란드
2023년 2월에 유럽연합 입법지침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26개 회원국 모두 올해 연말까지는 고용관계 추정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스페인·몰타·벨기에가 입법지침 확정 이전의 사례라면, 포르투갈은 확정 이후 첫 번째 입법 사례였다. 나머지 20여개 국가에서 입법 논의가 한창인데 그 중 하나가 폴란드이다.
정부나 노동조합만 먼저 입법된 사례를 검토한 것이 아니었다. 자본가들도 열심히 탐구에 나섰는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애초부터 추정 제도가 노동자에게만 유리하게 설계된 건 아니잖아? 잘만 활용하면 우리가 써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아!" 폴란드 입법 논의에 사용자단체는 다음과 같이 4가지의 '고용관계 추정을 위한 지표'를 제안하게 된다.
㉠ 하도급, 제3자 등 대체인력(대리인)을 사용할 자유가 없을 것
㉡ 제시된 업무를 수락하거나 거절할 자유가 없을 것
㉢ 둘 이상의 사업자를 위해 서비스를 제공할 자유가 없을 것
㉣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간을 스스로 정할 자유가 없을 것
문제는 폴란드 사용자단체가 이 4가지 모두를 만족해야만 추정이 발동될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었다는 점이다. 즉, 사용자가 반증에 나설 경우 4가지 중 단 1가지만 충족하지 않는다는 점을 입증하면 고용관계를 부정할 수 있도록 말이다. 4가지 지표를 보는 순간 느낌이 오지 않는가? 아, 모든 플랫폼노동의 노동자성을 부정하려는 목적이구나!
'근로자' 개념·범위 수정을 수반
미국과 유럽의 현황 전체를 돌아보면 '근로자 추정제'도 참 다양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거의 '자동 추정' 수준으로 추정의 발동 조건을 쉽게 열어놓았지만 적용 범위를 배달·배송 플랫폼으로 제한한 스페인·몰타 사례, 추정의 지표와 사용자 반증의 조건을 일치시키되 적용 범위를 플랫폼노동 전체로 확대한 벨기에·포르투갈 사례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관철되는 원리가 있다. 종전의 '근로자' 개념과 범위가 너무 낡았기에 이를 수정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입법이 완료된 스페인·몰타·벨기에·포르투갈은 (비록 플랫폼노동에 한정된 것이지만) 근로자 개념·범위를 적극적으로 확대한 사례인 반면, 아직 입법된 것은 아니지만 폴란드 사용자단체 제안은 극단적으로 줄이려 한다.
근로자 개념과 범위 수정은 '추정을 위한 지표' 설계를 통해 이뤄진다. 물론 지표 설계는 주먹구구 식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유럽연합 지침 초안이 제시한 5대 지표의 경우 유럽 각국에서 쏟아진 다양한 판례, 그리고 유럽사법재판소(CJEU)의 판결 내용들을 토대로 하고 있다.
가장 먼저 입법(2021년)이 이뤄진 스페인의 경우 2020년 9월 25일, 배달플랫폼 글로보(Glovo)를 통해 일감을 받는 라이더를 노동자로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나온 바 있다. 이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라이더를 노동자 또는 자영업자(TRADE)로 인정한 하급심 판례가 엇갈리고 있었는데, 이걸 대법원이 전원합의체 형태로 정리한 것이다.
폴란드 사용자단체의 제안 역시 대외적인 명분으로 CJEU의 판결 하나를 제시한다. 하지만 이 판결은 정식 판결이 아니라 판사 1명이 내린 '이유부 명령(reasoned order)'이었고, 영국의 비교적 덜 알려진 택배회사(Yodel Delivery Network) 1곳을 대상으로 한 사안이었다. 판결내용 역시 4가지 지표 모두를 만족해야 한다는 취지도 아니었다.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추정제는?
그렇다면 이재명 정부가 추진한다는 '근로자 추정제'는 어떠할까? 노동부는 솔선수범해서 정부안에 해당하는 김주영 의원 입법발의안에 대해 "근로자 개념을 넓히는 것은 아니"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당연히 '추정을 위한 지표' 따위도 없다. 미국·유럽에서 도입된 추정제 트렌드 흉내를 내되 합리적 핵심은 비켜가겠다는 것이다.
지표 설계, 아니 근로자 개념·범위를 수정하기 위한 판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한국의 대법원은 2024년 7월, 승차공유 플랫폼 '타다' 기사에 대한 판결에서 기존 대법원 판례가 제시한 노동자성 판단 요소 관련 온라인 플랫폼의 경우 다양한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며 최초로 플랫폼노동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온라인 플랫폼을 매개로 근로를 제공하는 종사자가 근로자인지를 판단하는 경우에는 노무제공자와 노무이용자 등이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연결됨에 따라 직접적으로 개별적인 근로계약을 맺을 필요성이 적은 사업구조, 일의 배분과 수행 방식 결정에 온라인 플랫폼의 알고리즘이나 복수의 사업참여자가 관여하는 노무관리의 특성을 고려하여 위 요소들을 적정하게 적용하여야 한다."
만일 이대로 입법이 이뤄진다면 사상 최초로 '근로자' 개념·범위 수정이 전혀 없는, 따라서 추정을 위한 지표 설계도 없는 글로벌 최초의 추정제가 될 것이다. 이것도 K-추정제라 불러야 할까? 물론 최종적인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다만 '최초'라는 말도, K-자가 붙은 개념들도 항상 그 끝이 좋지만은 않았음을 덧붙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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