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부장판사 지귀연)가 19일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며 판결문에서 17세기 영국 국왕 찰스 1세를 언급했다.
지귀연 부장판사가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2·3 비상계엄 관련 윤석열 전 대통령 내란 우두머리 혐의 사건 1심 선고공판에서 판결문을 낭독하고 있다. / 서울중앙지법 제공, 뉴스1
재판부는 군대를 동원해 의회를 압박했던 역사적 사례를 거론했다. 400여 년 전 영국에서 벌어진 사건을 소환한 것은 국가 권력이 대의기관을 무력화하려 한 행위의 역사적 파장을 환기하기 위한 취지로 풀이된다.
찰스 1세는 1625년 즉위해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를 통치했다. 그는 부친 제임스 1세로부터 왕권신수설, 즉 왕의 권력은 신이 부여한 절대적 권한이라는 사상을 물려받았다. 통치 초기부터 그는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걷거나 강제 공채를 발행하는 등 재정 확보를 위해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당시 영국은 종교적 갈등과 재정난이 겹친 상태였다. 청교도 세력이 강한 의회는 왕권을 견제하려 했고 찰스 1세는 이를 왕권 침해로 받아들였다. 결국 그는 1629년부터 1640년까지 약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는 ‘개인 통치’를 강행했다. 선박세(Ship Money)와 같은 조세를 의회 동의 없이 전국적으로 부과하면서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종교 정책도 갈등의 불씨였다. 그는 성공회 내 고교회파를 비호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 성향의 성직자들을 중용했다. 이는 청교도 세력에게 가톨릭적 요소를 강화하려는 시도로 비쳤고 스코틀랜드 장로교 세력의 반란으로까지 이어졌다. 결국 군사비 마련을 위해 다시 의회를 소집했지만 왕과 의회 간 불신은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태였다.
찰스1세 / 안토니 반 다이크 - National Portrait Gallery, 위키백과
결정적인 장면은 1642년 1월 벌어졌다. 찰스 1세는 자신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던 하원의원 5명을 반역 혐의로 체포하겠다며 약 400명의 무장 병력을 이끌고 직접 하원 의사당에 들어갔다. 영국 역사상 군주가 군대를 거느리고 의회에 난입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체포 대상이었던 의원들은 이미 피신한 뒤였다. 하원 의장은 왕의 요구에 대해 “저는 이 의회의 종으로서, 의회가 명령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취지로 응답하며 체포 협조를 거부했다. 이 장면은 오늘날까지도 의회 독립과 대의제의 상징적 순간으로 회자된다.
이 사건은 왕과 의회 간 갈등을 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몰아넣었다. 결국 같은 해 영국 내전이 발발했고, 왕당파와 의회파는 전국 각지에서 무력 충돌을 벌였다.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신모범군(New Model Army)이 전세를 뒤집으며 의회파가 우위를 점했고, 찰스 1세는 체포돼 재판에 회부됐다.
찰스 1세의 처형 장면 / 위키백과
1649년 1월, 찰스 1세는 반역 혐의로 특별 재판에 회부됐다. 그는 끝까지 법원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합법적인 국왕을 누가 재판할 수 있는가”라는 그의 주장은 군주권의 절대성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왕 역시 국가 공동체를 배신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찰스 1세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같은 해 1월 30일 런던 화이트홀 인근에서 공개 처형됐다. 군주가 법의 심판을 받아 단두대에 오른 사건은 유럽 정치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찰스 1세의 처형 이후 영국은 잠시 공화국 체제로 전환됐으나, 크롬웰의 권위주의적 통치와 왕정복고를 거치며 또 다른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권력은 법의 통제를 받는다’는 원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역사적 사례로 남았다.
지귀연 부장판사가 판결문에서 찰스 1세를 언급한 것은 통치 행위라 하더라도 헌정 질서를 침해하는 순간 법적 책임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군대를 동원해 대의기관을 압박하려 한 행위가 어떤 역사적 파장을 낳았는지 떠올리게 하려는 취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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