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최진승 기자] 최근 국내 영화산업은 유례없는 위기를 겪고 있다. OTT 플랫폼에 대한 종속과 제도적 미비로 인해 기초 생태계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달 21일 이재명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한국 영화산업의 현실을 "꽃은 화려하나 뿌리가 썩어가는 나무"에 비유하며 정책적 지원을 시사하기도 했다.
지난해 한국 영화계 현황은 '흥행 실종'과 '플랫폼 종속'으로 요약된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2025년 상반기 전체 극장 관객 수는 4250만 명으로 전년 대비 약 32.5% 급감했다. 상반기 매출액 또한 33.2% 줄어든 4079억 원에 그쳤다. 이 가운데 한국 영화의 점유율은 약 41.3%로 최근 4년 중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한국 영화계는 단 한 편의 천만 영화도 배출하지 못했다. 넷플릭스 등 OTT 플랫폼의 월간 순이용자 수(MAU)는 견고한 상승세를 유지한 반면 개봉관에서 관객 300만 명을 넘긴 한국 영화는 단 2편(좀비딸, 야당)에 불과했다. 제작사들은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OTT에 헐값으로 콘텐츠를 넘기는 '하청기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특히 독립·예술 영화의 경우 20만 관객을 돌파한 작품이 실사 영화 중 단 한 편에 불과할 만큼 유통망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 OTT 공습과 흥행 양극화에 신음하는 한국 영화계
이재명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극장 상영작의 OTT 공개 유예 기간인 '홀드백' 제도가 부재한 점을 지목했다. "조금 있으면 OTT에 나올 텐데 누가 극장에 가겠느냐"는 지적은 극장가 현실을 대변한 발언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도 제작사 입장에서 보면 반만 맞는 얘기다. 극장가의 침체 분위기 이면에는 오프라인 상영관의 고착화된 수익 배분 문제도 자리하고 있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현재 오프라인 극장의 관람료는 1만5000원에 달하지만, 정작 제작사가 손에 쥐는 금액은 4000원도 채 되지 않는 실정이다.
영화산업계 관계자는 "겉으로 보이는 티켓 가격은 높지만, 통신사나 카드 할인 등 극장의 마케팅 비용을 제외한 이른바 '객단가'를 기준으로 보면 제작사의 몫은 현격히 줄어든다"고 말했다. 극장 측이 마케팅 비용을 제외한 수익을 기준으로 정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제작사 측에 비용을 떠안기는 구조라는 얘기다. 이러한 구조는 영화 제작사들이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OTT의 저가 납품 제안에 휘둘리는 또 다른 요인이 되고 있다.
한국 영화산업의 '풀뿌리'인 독립·예술 영화의 현실은 더 열악할 수밖에 없다. 대작 위주의 극장 편성으로 인해 대다수 독립영화가 관객을 만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해 개봉한 한국 독립·예술 실사영화 가운데 20만 관객을 넘긴 작품은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이 유일했다. 국내 영화산업의 침체는 오랜 기간 누적된 복합적인 원인의 결과라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이는 다시 한국 영화의 제작 중단과 인재 유출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 스마트글라스, 스크린 수 제한 없는 '온라인 개봉관' 시험대
새로운 기기의 등장은 우리의 문화적 경험을 바꿔놓곤 했다. TV는 물론 PC와 스마트폰, 태블릿의 등장은 극장이라는 공간의 제약을 허물었다. 이러한 기기들은 이제 영화 관람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대안으로 자리잡았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여전히 오프라인 극장을 찾는 이유는 극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몰입감 때문이다.
최신 웨어러블 기기로 주목받고 있는 '스마트글라스'는 영화산업계에도 적잖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스마트글라스는 일반 안경의 무게와 큰 차이가 없는 초경량으로 설계된 안경 형태의 디바이스를 일컫는다. 기존 VR(가상현실) 헤드셋(HMD)의 무거운 무게와 낮은 해상도의 한계를 걷어내고 일상에서 장시간 착용할 수 있는 AR(증강현실) 기기로 주목받고 있다.
스마트글라스의 특징은 일상의 다양한 기기들과 호환된다는 점이다. 특히 안경 내부에 장착된 패널을 통해 송출되는 영상은 극장 못지 않은 몰입감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됐다. 국내 스마트글라스 개발사 관계자는 "모바일이나 TV의 평면적인 화면으로는 느낄 수 없는 영화적 몰입감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 회사의 시제품을 착용하면 4m 앞에 135인치 크기의 가상 대화면을 통해 영화를 관람할 수 있다. 이 제품은 소니(Sony)의 OLED 디스플레이 모듈을 탑재해 실제 영화관의 2K 프로젝터 수준의 선명도를 구현했다.
◇ '1인 영화관' 시대 가시화... 영화산업계 변화 예고
스마트글라스는 향후 '퍼스널 씨어터'(Personal Theater)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안경 형태의 디바이스는 주변 시야가 차단되어 외부 환경에 방해받지 않고 영화에만 집중할 수 있는 '개인 전용 영화관'이 된다.
스마트글라스가 보편화될 경우 국내 영화 유통산업의 병목 현상을 해결할 기술적 열쇠가 될 수 있다. 초경량 기기에서 보여지는 135인치 대화면은 극장과 동일한 몰입감을 제공하면서도 물리적 스크린 수의 제약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회사는 스마트글라스 기반 플랫폼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회사 관계자는 "현재 독립·예술영화 중심의 온라인 상영관을 준비 중"이라며 올해 안에 시범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온라인 상영관의 특징은 무제한 상영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기존 극장에서 외면받던 독립영화와 단편영화들이 스크린의 제약 없이 전 세계 관객을 대상으로 노출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제작사의 수익성 개선에도 보탬이 될 전망이다. 온라인 상영관은 관람료를 대폭 낮추면서도 유통 수수료를 없애 제작사측에 보다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구조를 갖출 수 있다. 또한 국내 영화 배급망에만 그치지 않고 스마트글라스를 보유한 전 세계 이용자들에게 영화를 개봉함으로써 'K-독립영화'를 글로벌 시장에 알리는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다.
스마트글라스 개발사 관계자는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기기를 파는 것이 아니라 제작사가 정당한 대가를 받고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는 건강한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회사는 국내외 영화제와 다양한 협업을 모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스마트글라스 기반 '온라인 개봉관'이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지 여부는 미지수다. 하지만 영화산업계에도 변화의 바람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한국 영화산업계가 위기를 생태계 회복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지 두고볼 일이다.
뉴스컬처 최진승 newsculture@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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