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거주 러시아 출신 건축가…그린란드 사태로 미국에 저항하는 덴마크 피켓도 들어
(밀라노=연합뉴스) 이영호 기자 = "모든 러시아인이 전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작은 행동이라도 하고 싶었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 개회식에서 우크라이나 선수단의 입장을 이끈 '피켓 요원'이 러시아 출신 건축가로 알려져 눈길을 끈다.
17일(한국시간) AP 통신에 따르면 이탈리아 밀라노에 사는 러시아 출신 건축가 아나스타샤 쿠체로바는 올림픽 개회식에서 우크라이나 선수단을 경기장으로 인도하는 '피켓 요원'을 자원했다.
쿠체로바는 다른 피켓 요원과 마찬가지로 은색 코트와 짙은 색안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등장해 조용히 '우크라이나' 국가명이 써진 피켓을 들고 입장했다.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애초 피켓 요원들의 국가 배정을 무작위로 진행했지만, 나중에 연출가가 자원봉사자들의 의견을 묻자 쿠체로바가 직접 우크라이나를 선택했다.
밀라노에서 14년을 산 쿠체로바가 우크라이나 선수 5명과 함께 개회식이 치러진 밀라노 산시로 스타디움에서 행진할 때까지 그의 국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쿠체로바는 이후 팔로워수가 879명에 불과한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자신의 역할을 공개했고, 이후 AP 통신과 인터뷰를 통해 생각을 털어놨다.
그는 "우크라이나 선수들 곁을 걸으며 그들이 러시아인에게 증오를 느낄 권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하지만 모든 러시아인이 전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작은 행동이라도 하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쿠체로바는 이번 선택이 독살된 러시아 반체제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의 사망 2주기 맞물려 있다고 설명하면서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고 운동하며 올림픽에 출전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이 참혹한 전쟁을 배경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우크라이나 선수들은 내가 국적을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알아차리고 러시아어로 말을 걸었다"며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사이의 어떤 깊은 연결이 있다는 징표"라고 설명했다.
쿠체로바와 함께 입장한 우크라이나 선수 가운데 기수인 쇼트트랙 선수 엘리자베타 시토르코와 피겨 스케이팅 선수 키릴로 마르사크는 모두 아버지가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쿠체로바는 "경기장 전체가 기립 박수를 보낼 것이라고 말했을 때 선수들은 처음에 회의적인 반응이었다"라며 "실제로 엄청난 환호가 터져 나오자 나도 모르게 색안경 뒤로 눈물을 흘렸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2018년 이후 러시아를 방문하지 않았다는 쿠체로바는 "러시아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게 지인들에게 해를 끼칠까 걱정된다"며 "민주주의 국가에 살면서 모든 자유를 누리는 내가 두려움을 느낀다면 이것은 러시아가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쿠체로바는 개회식에서 덴마크 선수단의 피켓도 들었다.
덴마크 선수단도 자치령인 그린란드를 인수하겠다는 미국의 위협에 저항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 때문에 관중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쿠체로바는 "이것 역시 우연의 일치였다. 그래서 그린란드와 미국의 사건 역시 곰곰이 생각해봤다"고 말했다.
horn9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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