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압박에 직면한 유럽 각국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금융 체제와 디지털 기술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고 12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현재 시민과 기업, 정부의 모든 구매와 정보 교환을 떠받치는 글로벌 금융 네트워크와 기술 시스템은 사실상 미국 기업들이 지배하고 있다. 이에 따라 유럽 동맹국들은 자국의 금융 주권과 국가 기밀 데이터의 안전성이 미국의 정치·경제적 결정에 좌우될 수 있다는 우려를 키우고 있다.
유럽은 특히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빅테크 기업의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와 마스터카드, 비자 같은 결제 네트워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벨기에에서 열린 유럽연합(EU) 비공식 정상회의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의 미국 금융·디지털 서비스 의존이 미국의 정치·경제적 압박에 취약성을 높이고 있다고 경고했다. 댄 데이비스 전 영국 중앙은행 경제학자도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의 필요를 leverage(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이를 “명백한 국가안보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중앙은행(ECB)에 따르면 지난해 유로화 사용국에서 이뤄진 거래의 거의 3분의 2가 마스터카드나 비자를 통해 처리됐다. 오스트리아, 스페인, 아일랜드 등 최소 13개국은 결제 수단에 대한 국가 통제 장치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다. 이에 따라 과거 러시아나 이란에 적용된 미국의 금융 제재가 유럽 국가들에도 사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지난달 70명의 저명 경제학자와 전문가들은 유럽의회에 서한을 보내 “경제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인 화폐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미국이 가자지구 전쟁 범죄 혐의를 조사 중인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속 판사와 검사들을 제재한 사례를 언급했다. 제재 대상자들은 신용카드를 포함한 디지털·금융 서비스 접근이 차단됐고, ICC 수석 검사의 마이크로소프트 이메일 계정도 중단됐다.
이는 미국이 금융 및 기술 지배력을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유럽 정부와 안보 당국에 큰 충격을 안겼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기술 기업을 규제하거나 과세할 경우 EU에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해 왔다.
데이터 주권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미국의 해외정보감시법(FISA)과 클라우드법은 영장 없이 외국인의 통신을 감시하고, 전 세계 어디에 있든 미국 기업이 보유한 데이터를 정부에 제출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프랑스 정부는 이러한 위험을 이유로 공공 부문에서 미국 영상 플랫폼 사용을 중단하고 자국 플랫폼으로 전환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미국 기술·금융 기업 의존도를 낮추는 것은 쉽지 않다. 유럽은 디지털 기술의 최소 8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글로벌 정보통신기술(ICT) 시장 점유율도 2013년 22%에서 2022년 11%로 급감했다. 인공지능 분야에서도 미국과 중국에 크게 뒤처져 있다. 영국, 독일, 스페인, 노르웨이 등에서 진행 중인 AI 프로젝트 상당수는 막대한 자본력을 가진 미국 빅테크와의 협력에 의존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구글 등은 유럽 정부에 신뢰를 강조하고 있지만, 미국 정부가 국가안보를 이유로 데이터 제공이나 서비스 제한을 요구할 경우 이를 거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구심이 남아 있다.
최규현 기자 kh.choi@n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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