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영화의 제 1법칙이 있다면 '첩보'가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충돌을 이용하는 것이다. 007 시리즈의 냉전 이데올로기,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기술자본주의는 모두 각 시리즈가 장수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이념들이다. 핵심 정보를 뺴내기 위해 적진 깊숙이 숨어 들어가야 하는 주인공의 긴장감은 시대를 관통해왔던 이념들이 얼마나 강렬하게 충돌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일까? 대체로 많은 첩보영화들 속 구원의 대상은 인류 그 자체였다. 버튼 하나로 3차 대전이 발발할 가능성, 전 지구가 기술문명에 의해 초토화될 가능성, 이를 막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야 하는 주인공의 외로운 도전이 첩보영화의 핵심이었다.
류승완 감독은 헐리우드가 구축한 첩보영화의 공식을 영리하게 배반한다. 남한과 북한의 정치적 대립은 첩보영화의 토대가 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경찰국가를 자처하며 전 지구적 정치 경제 상황에 영향을 주는 미국이 영화 속에서 세계 구원을 자처하는 것과 달리 강대국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하는 남한이 세계 구원을 자처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강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를 잘 이해하고 있는 류승완 감독은 첩보영화 속에서 충돌하는 거대한 이념들을 조직과 개인으로 축소시키고 조직에 의해 희생될 수밖에 없는 개인을 애도하는 방식으로 긴장을 이끈다. 이는 제이슨 본 시리즈가 펼쳐보인 희생당한 개인의 복수와 다른 결이다. 제이슨 본은 자신을 희생시키려던 조직에 복수를 감행하다 그 조직이 행하려던 거대한 음모를 발견하고 이를 가로 막는 영웅으로 변모한다. 류승완 감독은 철저히 영웅적 묘사를 배제하며 구원될 수 없는 작은 개인이 국가와 조직 속에서 어떻게 처참히 배제되고 지워질 수 있는지에 주목한다. 그에게 첩보영화는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빚어내는 스팩터클을 과시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모순으로 가득한 체제에 맞서는 개인의 심리와 내적 갈등,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결국 파국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 최대한의 선을 지켜야하는 자들의 치열한 분투극에 가깝다. 이는 강대국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 할 수밖에 없는 한반도의 운명과도 맞닿아 있다. 어쩌면 류승완 감독에게 첩보영화 속 주인공은 한반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첩보영화가 드문 한국영화의 현실을 고려 할 때 류승완 감독이 두 편의 첩보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특히 그의 두 번째 첩보영화 <휴민트>(2026)가 전작인 <베를린>(2013)과 정확히 공명한다는 점은 반드시 주목해봐야 한다. 자신을 희생양 삼으려는 정권으로부터 아내 련정희(전지현)를 구해야 하는 표종성(하정우)의 운명은 오해로 갈라진 약혼녀 채선화(신세경)를 구해야 하는 박건(박정민)의 운명과 닮아 있다. 표종성과 박건은 모두 북한 체제에 충실한 영웅이고 단단한 그들의 신념은 체제에 기생하는 자들(<베를린>의 동명수(류승범)와 <휴민트>의 황치성(박해준))로부터 걸림돌이 되어 숙청의 대상이 된다. 이들의 대립 관계는 류승완 감독이 그려내는 첩보영화의 핵심이다. 삼각 관계의 축을 만들기 위해 남한의 안기부 요원들(<베를린>의 정진수(한석규)와 <휴민트>의 조과장(조인성))이 배치되긴 하나 그들의 시선은 관찰자에 더 가깝다. 첩보영화의 장르적 긴장을 북한 체제 내부로부터 촉발시키고 남한의 관찰자적 시선을 통해 불을 지피려는 전략이다. 언제나 변수를 품고 있는 북한의 정치적 상황, 북한과 적대적 관계 속에서 협력적 관계를 동시에 이끌어 내야 하는 남한의 고민들이 장르영화 속에 섬세히 배치되어 있는 셈이다.
북한 내부의 모순, 그에 대항하는 힘, 그들 사이에서 공명하는 관찰자까지, 류승완 감독은 대립과 협력, 의심과 신뢰가 교차하는 인물들의 촘촘한 관계망 속에서 구원의 대상을 '북한 여성'으로 압축한다. 류승완 감독에게 북한 여성은 체제 내부에서 발생하는 비리와 음모가 집약적으로 투영되는 대상이다. 그녀들은 정권의 헤게모니를 거머쥐려는 자들에 의해서, 또는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집요하게 접근해온 자들에 의해서 위기에 노출되고 구원의 대상이 된다. 이 순간 배재되는 그녀들의 욕망과 선택 가능성은 분명 북한 여성들에 대한 한계 어린 시선이 반영된 결과라 비판될 수 있다. 여성의 신체를 도구 삼아 장르적 긴장을 쌓아 가려는 남성적 시선이 두 작품을 모두를 관통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단, 서사가 표면적으로 가리키는 구원의 대상과 달리 감독이 진심으로 구원하고자 했던 대상은 어쩌면 북한 여성이 아닌 북한 남성일지도 모른다.
<베를린>에서 표종성은 련정희를 구하지 못한 채 그림자처럼 체제 외부를 떠돌아 다니는 존재로 사라진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카메라는 빠른 속도로 숲 속을 내달리는 표종성의 움직임에 주력하며 체제의 희생양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그의 힘을 포착한다. 라트비아의 기차역으로 향하며 복수를 다짐하는 표종성의 힘은 구원의 서사를 복수의 서사로 전환시킨다. 비록 <베를린>은 이 순간 막을 내리지만 13년이 흐른 2026년, <휴민트>는 표종성이 도달하려 했던 블라디보스토크를 배경으로 새로운 구원의 서사를 펼친다. 왜 복수가 아닌 또 다시 구원의 서사야여 했을까? 아직 구원되어야 할 존재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을까? <베를린>에서 구하지 못했던 련정희를 채선화로 환생시켜 박건에 의해 또 다시 구원하도록 만든 두 작품 사이의 연관성은 쉽게 간과하기 어렵다.
두 작품 모두 표면 위에서 구원의 대상은 언제나 북한 여성이었다. 련정희와 채선화는 위기의 중심에 놓이고, 서사는 그들의 구원을 향해 질주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관객의 시선에 남는 잔상은 그녀들의 얼굴이 아니다. 체제의 명령에 충실했기에 더 쉽게 버려질 수 있었던 자, 그 명령에 의문을 품었기에 더 빠르게 제거된 자, 표종성과 박건의 이미지들이다. <베를린>의 마지막, 숲을 가로지르던 표종성의 질주는 단순한 복수의 예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끝내 완수되지 못한 미션의 잔향이었다. 체제의 논리에 의해 밀려난 한 인물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아직 끝나지 않은 무엇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장면이었다. 13년이 흐른 뒤 <휴민트>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를 호출하는 순간, 그 미완의 과제는 이름만 바꾼 채 박건의 이미지로 옮겨진다. 이 순간 구원의 대상이 미묘하게 이동한다. 인신매매의 위기에 내몰린 북한 여성들이 탈출하는 것이야말로 장르적 목표인 듯 보이지만, 영화가 집요하게 따라붙는 감정선은 체제와 맞서다 소모되는 남성 요원들의 운명에 있다. 표종성이 구하지 못한 련정희의 그림자는 채선화의 얼굴 위로 겹쳐지고, 박건은 그 그림자를 붙잡기 위해 다시 같은 길 위에 선다. 그러나 이 길은 처음부터 승리를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션이 끝나기 위해서는, 서사가 종결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반드시 희생되어야 한다는 냉혹한 조건을 암시한다.
박건이 살아남는 결말은 애초에 감독의 계획에 없었을 것이다. 마치 13년 전, 련정희의 죽음이 당연한 귀결이었던 것처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채선화의 구원을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시킨 박건을 향한 애도의 시선이 영화 속에 짙은 여운을 남긴다는 점이다. 체제의 모순을 인식하고 그에 맞서 싸우려는 작은 개인들의 투쟁은 승리로 쉽게 봉합되지 않는다. 그들의 승리는 오직 영웅 신화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선택지다. 류승완 감독은 헐리우드가 쌓아올린 영웅 신화를 철저히 거부하고 세계를 구하는 영웅이 아닌 세계의 균열을 온 몸으로 감당하는 존재, 그 속에서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를 소멸시킬 수밖에 없는 존재들을 애도한다. 박건을 애도하는 조과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표종성이 끝까지 불태운 복수에 대한 의지가 남아있지 않다. 자신이 구원하지 못한 자들에 대한 죄책감만이 화면을 무겁게 짓누를 뿐이다. 감독의 이전 작품들을 고려하면 지극히 낯선 결말이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복수와 응징의 파토스가 아닌 애도만으로 마무리 짓도록 만든 것일까? <휴민트>만으로는 아직 판단 불가다. 이후 작품이 등장한다면, 다시금 살펴볼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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