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진만 하는데 내비게이션 주소가 몇 번이나 바뀌는 묘하게 신기한 길이 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만든 이미지
운전을 하다 보면 도로변에 붙은 ‘안녕히 가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표지판을 마주칠 때가 있다. 어느 순간 행정구역을 벗어났다는 뜻이고 자연스럽게 ‘아, 다른 동네로 넘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표지판은 시·군 경계나 구 경계를 지날 때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런데 행정구역이 유난히 자주 바뀌는 도로가 있다. 내비게이션을 켜고 달리다 보면 지도에 표시되는 주소가 몇 번이나 바뀌고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는 ‘어서 오십시오’ 같은 안내를 스치듯 마주치기도 한다. 방향을 틀지 않았는데도 도시를 들락날락하는 기분이 드는 길이다.
벌말로 / 카카오맵 로드뷰 캡처
그 길이 바로 벌말로다. 총연장 8km 남짓한 이 도로는 경기도 부천에서 출발해 서울 강서구와 인천 계양구를 스치듯 지나 김포로 넘어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흐름을 갖고 있다. 같은 길을 계속 달리고 있는데도 구간마다 행정구역이 바뀌어 내비게이션 화면에서 주소 표기가 몇 번이나 달라지는 게 특징이다.
부천에서 출발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내비게이션 지도에서 표기가 서울 강서구로 바뀌고, 다시 조금 더 가면 인천 계양구로 넘어간다. 방향을 바꾸지도 않았고 같은 길을 달리고 있는데 행정구역이 달라지는 변화가 화면에 보인다.
벌말로 / 카카오맵 로드뷰 캡처
조금 더 달리면 이번에는 경기도 김포시로 표기가 바뀐다. 김포로 넘어왔다는 생각이 들 즈음 다시 서울 강서구로 들어서고, 또 한 번 김포시를 지나 최종적으로는 서울 강서구로 이어진다. 총연장 8km 남짓한 도로를 달리는 동안 행정구역 표기가 다섯 번 이상 바뀌는 셈이다.
이 구간을 실제로 주행하면 ‘이제 안녕’, ‘다시 반갑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반복하게 된다. 한 도로 위에서 네 개 지자체를 오가며 표지판만 보고도 지금 내가 어느 도시를 달리고 있는지 계속 확인하게 된다.
벌말로가 이렇게 보통과 다른 풍경을 만드는 이유는 도로가 도시의 외곽 경계를 따라 놓여 있기 때문이다. 길은 하나지만 그 길을 기준으로 행정구역 경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방향을 틀지 않고 신호 몇 개를 지날 뿐인데 다른 도시로 들어서게 되는 구조다. 짧은 거리 안에서 행정구역이 여러 차례 바뀌는 경험은 흔치 않지만 벌말로에서는 일상처럼 반복된다.
서울시 강서구 벌말로 노선 중 서울시 구간 도로 확장관련 자료.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 / 서울시 제공
벌말로를 달리다 보면 풍경도 다른 도로와는 조금 다르다. 도로 주변으로 높은 건물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시야가 비교적 탁 트여 있다. 이 일대가 김포공항과 인접해 있어 항공기 이착륙 경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고도 제한이 적용되는 구간이라 주변 건물 높이가 낮게 형성돼 있고, 타이밍이 맞으면 머리 위로 지나가는 항공기의 모습도 쉽게 눈에 들어온다.
이쯤에서 의문이 생긴다. 이렇게 자주 경계가 바뀌는 길이라면 차라리 행정구역을 한 번에 정리해 통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행정구역 경계 조정은 여러 지자체가 함께 조율해야 하고 경계가 움직이면 주민 행정서비스뿐 아니라 세금과 각종 권한도 함께 따라 움직인다. 이해관계가 맞물리니 쉽게 결론이 나기 어렵다.
비슷한 경계의 복잡함은 도로뿐 아니라 생활 공간 곳곳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경계선이 촘촘하게 얽힌 지역에서는 같은 생활권인데도 관할이 달라 불편이 생기고 주소와 행정처리가 애매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경계선 위에 지어진 건물에서 흔히 ‘한 지붕 두 주소’ 문제가 나타난다.
대표 사례로 서울 보라매우성상가·아파트는 관악구와 동작구 경계에 걸쳐 있고, 광화문빌딩은 종로구와 중구 경계에 걸쳐 있다. 이런 건물에서는 같은 건물 안에서도 층이나 호수에 따라 주소가 달라질 수 있고 생활권과 행정 처리가 엇갈리며 혼란이 생긴다. 자녀 학군 같은 생활 문제부터 각종 행정 민원 처리까지 애매해지는 지점이 생기기도 한다.
보라매우성상가·아파트의 경우 과거 해당 구간이 행정구역을 가르던 도로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재개발 과정에서 도로가 사라지고 그보다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건물이 들어서면서 복잡한 주소 체계가 만들어졌다.
광화문빌딩 역시 여러 행정구역의 필지에 걸쳐 있던 부지에서 재개발이 진행되며 구가 나뉘는 구조가 생겼고 층별로 관할이 갈리기도 했다. 도로명주소 도입 이후 주소 표기는 한쪽으로 정리됐지만 재산세는 토지 지분 비율에 따라 나눠 걷고 있다.
경계를 하나로 정리하면 깔끔하다는 생각과 별개로 현실에서는 조정에 따른 손익이 갈리고 책임과 권한이 함께 움직인다. 경계가 복잡하게 남아 있는 이유가 단순한 행정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지자체 간 조율과 이해관계의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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