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특집기획 종이의 시대②] 디지털 과부하 시대, ‘슬로우 미디어’ 종이책의 생존 전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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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특집기획 종이의 시대②] 디지털 과부하 시대, ‘슬로우 미디어’ 종이책의 생존 전략은

투데이신문 2026-02-17 12:53:0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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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종이 매체는 인간이 겪지 못하는 세계를 생동감 있게 체험시켰다. 타국과 우주, 과거, 타인의 삶부터 존재하지 않는 세계까지, 종이책과 잡지 등은 언제나 인류가 가진 경험의 경계를 확장해 왔다. 그러나 기술 발전과 콘텐츠 유통 구조의 변화는 종이 매체를 우리의 손길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월간 샘터의 무기한 휴간 역시 디지털 시대의 도래로 종이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는 하나의 신호일 것이다.

세대가 지날수록 아이들은 종이만의 감성을 경험하기 어려워지고 종이 매체만이 갖는 매력을 아는 이들이 사라질수록 종이 매체의 위치는 위태로워진다. 투데이신문은 본 기획을 통해 저물어가는 종이 매체를 부활시킬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2025년 9월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에서 개최된 가족숲속도서관 행사의 야외 팝업 도서관에서 한 어린이가 책을 고르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2025년 9월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에서 개최된 가족숲속도서관 행사의 야외 팝업 도서관에서 한 어린이가 책을 고르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지난해 12월 호주에서 세계 첫 ‘청소년 소셜미디어 금지법’이 시행된 후 과도한 SNS 사용으로 인한 우울·불안 증상, 수면 부족, 사이버 괴롭힘 등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며 “청소년 보호를 위한 공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프랑스와 스페인 등 일부 국가에서는 청소년의 SNS 이용 연령을 법으로 제한하거나 부모 동의 없이는 계정을 만들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관련 규제가 없는 국내에서는 자의적으로 디지털 기기 몰입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발생하고 있다. 일정 기간 동안 스마트폰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멀리하고 사용을 자제하는 ‘디지털 디톡스’는 2020년대 이후 국내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 흐름을 타고 있다.

디지털 디톡스를 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대체활동으로는 아날로그의 대표 주자인 ‘독서’가 꼽힌다. 나라살림연구소의 ‘지방자치 이슈’에 따르면 2024년 디지털 디톡스 카페 이용자 수가 늘어나고 있다. 디지털 디톡스를 컨셉으로 설정해 입장할 때 스마트폰을 수거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북카페가 강남 한복판에 생길 정도다.

스마트폰과 SNS의 대안으로 독서가 거론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독서 활동이 집중력과 인지 기능을 향상시키고 스트레스 수준을 완화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다수 보고돼 왔다. 특히 종이책을 통한 독서는 주의 전환을 잦게 요구하는 디지털 환경과 달리 한 방향의 정보 흐름에 몰입하도록 도와 심리적 안정감을 높이는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로 디지털 디톡스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책을 집어 든 이들 사이에서는 “불안이 줄고 잠자리가 나아졌다”는 체감 후기가 늘고 있다. 디지털 디톡스 카페처럼 휴대전화를 잠시 내려놓게 만드는 공간이 확산되는 흐름과 맞물리며 독서는 디지털 과부하를 완충하는 대표적 선택지로 자리 잡는 분위기다.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쿨 미디어’ 종이책 독서의 상상력에 뛰어들다

종이 매체는 자기완결성을 갖춰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스트레스 수준을 완화할 뿐만 아니라 상상력을 기르는 훈련에도 도움을 준다는 견해가 다수 존재한다. 

미디어이론가 맥루한은 1964년 미디어를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로 구분했다. 전문가의 말을 따르면 종이 매체는 최근 들어 쿨 미디어로 부상하고 있다. 점점 더 짧은 포맷으로 변해가며 상상력을 제한하는 숏폼(60초 내 짧은 영상) 등 ‘핫 미디어’가 미디어 시장을 장악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를 가르는 기준으로는 ‘정세도’와 ‘참여도’가 꼽힌다. 정세도는 특정 메시지를 하나의 감각이 받아들이는 정보의 ‘자세함’ 정도를 뜻하며 데이터의 충실도와 맞닿아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핫 미디어는 정세도가 높아 수용자가 내용을 보완하거나 상상으로 메울 필요가 상대적으로 적다. 반대로 쿨 미디어는 정세도는 낮지만 수용자가 의미를 적극적으로 채워 넣어야 하므로 상대적으로 참여도가 높다. 정세도와 참여도는 반비례 관계인 셈이다.

대표적 종이 매체인 책은 정세도가 낮고 참여도가 높은 대표적 ‘쿨 미디어’ 중 하나다. 한국독서치료학회 회장을 역임한 최인자 교수는 “책은 최근 미디어에 비해 정보가 미흡하다. 구어나 디지털 텍스트에 비해 정보가 덜 주어지기 때문에 독자가 상상력으로 채워야 할 부분이 많다. 상상하거나 의미를 구성해내고, 자기 경험을 연결하면서 읽게 된다”고 설명했다.

또한 최 교수는 “종이 매체에 담긴 텍스트 자체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면서 “디지털 텍스트는 계속 수정·변형되는 ‘텍스트 흐름’에 가까워 임의적이고 역동적인 반면 종이 읽기는 한번 정해지면 고정되고 안정된 ‘자기 완결성’을 갖는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문자는 상징 기호이기 때문에 뇌가 이해하기에 친절한 형식이 아니고, 독자는 문자를 보면서 머릿속에서 심상과 이미지를 그려내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며 “그래서 독서하는 행위는 심상화·영상화·이미지화 같은 적극적 인지 행위를 포함한다”고 강조했다.

2024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시민들이 모여 독서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2024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시민들이 모여 독서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소유’하고 ‘감각’할 수 있기에 매력적인 종이 매체

종이 매체는 물리적 공간을 차지해 보관이 번거롭다는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실물을 소유할 수 있다’는 점은 디지털 콘텐츠가 대체하기 어려운 매력으로 꼽힌다. 책장에 꽂아두거나 가방에 넣어 다니며 손에 쥐는 과정 자체에서 감성을 느끼는 독자들도 적지 않다.

오프라인에서 주로 발간되던 종이 잡지 ‘월간 말 샘터’ 역시 ‘소유 가능한 콘텐츠’라는 이유로 독자들의 호응을 받아 왔다. 샘터 한재원 편집장은 “종이 매체는 디지털 매체와 달리 실물로 받아보고 간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라며 “온라인은 전환 속도가 빨라 기억에서 쉽게 휘발되거나 일회성으로 소비되기 쉬운데 종이는 감각할 수 있고 보관도 가능해 애정을 갖기 쉽다”고 말했다.

그는 잡지의 형식 자체도 종이 매체의 강점이라고 짚었다. 한 편집장은 “잡지는 한 권 안에 다양한 종류의 읽을거리가 담겨 있어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 읽어도 되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야 한다는 부담에서도 비교적 자유롭다”며 “짧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흐름과 맞닿아 있어 ‘쇼츠 콘텐츠의 종이 버전’으로 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종이가 주는 감각적·정서적 안정감도 언급됐다. 독서치료학회 오진령 교수는 “종이 매체는 추억을 환기하고 안정감을 준다. 종이가 주는 편안함에는 자연물, 특히 식물에서 온 따뜻함이 있다”며 “반대로 AI 기반 콘텐츠는 건조하고 정서가 부재한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도 종이 매체의 감각적 효과를 뒷받침하는 연구가 꾸준히 보고되고 있다. 해외 연구들은 종이가 촉각·공간감 등 감각 단서를 제공하는 만큼 디지털 화면에 비해 텍스트 이해와 심층적·비판적 사고에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해 왔다. 특히 아동의 경우 종이책 읽기를 통해 ‘깊이 읽기’를 돕는 경험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로 스페인 발렌시아대학교와 이스라엘 테크니온 연구진은 2000~2017년 발표된 관련 실험 연구를 종합한 메타분석에서 종이로 읽을 때가 화면으로 읽을 때보다 독해 성과가 유의미하게 높다는 결과를 제시했다. 연구진은 특히 시험처럼 시간 제약이 있는 상황에서 종이 읽기의 이점이 더 크게 나타나는 경향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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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종이매체·AI 과도기...감성과 지성의 조화로 나아가다

인공지능이 고도화된 디지털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종이 매체의 존속을 우려하는 시선도 적지 않다. 다만 관련 분야 전문가들은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다고 해서 종이 매체가 사라질 것이라고는 전망하지 않았다. 이들은 종이 매체의 종말을 단정하기보다 디지털 기술과의 공존을 통해 새로운 역할을 모색해야 한다는 데 입을 모았다.

종이 매체와 디지털 기술의 조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KT밀리의서재(이하 밀리의서재)가 거론된다. 전자책 구독 서비스로 출발한 밀리의서재는 2023년 이후 독서 경험을 오프라인으로 확장하는 동시에 AI 기반 추천 기능을 전면에 내세우며 읽기의 방식을 다변화하고 있다.

실제로 밀리의서재는 2025 서울국제도서전 현장에서 AI 추천 시스템 기반의 도서 큐레이팅 서비스 ‘AI 독파밍’을 선보였다. 현장에는 ‘AI 독파밍’(독서와 파밍(farming)을 결합한 신조어) 존을 마련해 이용자가 AI와 대화하듯 취향을 입력하면 추천 도서를 받아보고 이를 항공권 형태의 티켓으로 출력해보는 체험을 제공했다. 

전자책과 종이책을 넘나드는 확장력에 시장 내 존재감도 이어지고 있다. 밀리의서재는 전자책 플랫폼 시장 점유율 61.8%를 제시하며 업계 1위 지위를 강조했다. 밀리의서재 관계자는 “AI 독파밍 서비스는 AI 기능을 활용해 독자들에게 더 나은 독서 경험을 선사하길 목적으로 했다”며 독서 경험 확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될수록 종이책과 디지털 매체의 공존법 모색이 종이 매체 생태계의 과제로 떠오른다. 대한출판문화협회는 “AI는 방대한 정보를 빠르게 정리해 개인 맞춤형 추천과 답변을 제공한다는 강점이 있고, 종이책은 깊이 있는 사유와 집중, 물성을 통한 경험을 제공한다는 강점이 있다”면서 “이제 답변하는 인간이 아니라 질문하는 인간을 위한 교육과 투자가 필요한 시대가 됐다는 점에서 독서는 AI 시대 개인의 성장과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끄는 핵심 동력”이라고 전했다.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을 맞아 지난해 4월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광화문 책마당에서 시민들이 독서를 즐기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을 맞아 지난해 4월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광화문 책마당에서 시민들이 독서를 즐기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서일대 미디어출판학과 한주리 교수는 “출판 시장의 미래는 디지털 매체와의 공존과 전문화에 있다”면서 “출판 시장은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학술 독자, 전문가, 깊이 있고 신뢰할 수 있으며 실질적인 미디어 경험을 중시하는 독자층과 같은 틈새 시장을 계속해 공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검증되지 않은 온라인 정보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도서가 지닌 독자의 신뢰성과 믿음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포지셔닝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서 교수는 종이 매체가 AI 시대에 점점 중요한 역량으로 꼽히는 문해력, 창의력, 비판적 사고력, AI 리터러시 등을 향상하는 데 필수적인 정보 전달 매체로 꼽히는 만큼, 국가 경쟁력 측면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분야라고 강조했다.

그는 “향후 출판 산업 분야의 미래 비전을 위해 원천 콘텐츠 차원의 IP핵심 산업으로서 개념 확립과 출판산업 내 인식 변화 등이 요구된다”며 “출판 매체는 더 넓은 디지털 생태계 속에서 그 역할을 재구성해 나가며 지속적으로 중요성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정부 역시 독서문화 진흥을 축으로 종이 매체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종이책과 전자책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기보다 ‘독서’ 자체에 주목하고 AI 시대에 더욱 중요해지는 문해력과 비판적 사고력의 기반으로 독서를 바라본다는 입장이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AI 시대일수록 정보를 비판적으로 읽고 판단하는 힘이 중요해지고 그 중심에 독서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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