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최병일 칼럼니스트]
인간은 동물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매트 모건 지음/지식서가
영국의 중환자 전문의 매트 모건 박사가 쓴 '인간은 동물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지식서가)는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한다. 인류의 생명을 구한 것은 과연 첨단 기술일까, 아니면 자연이 오랜 세월 빚어낸 동물들의 생존 전략일까. 모건 박사의 대답은 분명하다. “우리는 동물에게 빚지고 있다.”
책은 캥거루, 기린, 개구리, 고래 등 서로 다른 생태 환경에 사는 생명체들의 신체 메커니즘이 어떻게 현대 의학의 혁신으로 이어졌는지를 촘촘히 추적한다. 단순한 동물학 교양서가 아니라, 생물의 적응 전략이 인간 치료법으로 ‘번역’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의학 르포에 가깝다.
호주 캥거루 암컷은 세 개의 질을 갖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 독특한 삼중 구조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수정란 착상 메커니즘의 단서를 발견했고, 이는 체외수정(IVF) 기술 발전에 중요한 영감을 줬다. 1977년 세계 최초 시험관 아기 탄생으로 이어진 배경에도 동물 번식 연구가 있었다. 모건 박사는 “동물의 번식 전략은 인간 생명의 기적을 재현하는 열쇠였다”고 말한다.
기린은 길게 뻗은 목 덕분에 높은 나뭇잎을 먹지만, 그만큼 급격한 혈압 변화에 노출된다. 머리를 숙였다 드는 과정에서 뇌혈류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혈압 조절 시스템 연구는 천식 치료제 개발과 인공호흡기 설계에 응용됐다. 기린의 점진적 호흡 패턴은 인간 호흡기 치료 장치의 모델이 됐다.
개구리는 피부로도 산소를 흡수한다. 이 ‘피부 호흡’ 원리를 모방한 인공 폐장치는 중환자실 생존율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특히 폐렴 등으로 기도에 이물질이 유입됐을 때 개구리가 이를 배출하는 메커니즘은 기도 확보 기술 개선으로 이어졌다. 모건 박사는 “개구리가 비스킷 조각을 흡입해도 살아남는 방식을 연구한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전한다.
바다로 눈을 돌리면 혹등고래가 있다. 잠수 시 심박수를 분당 2회까지 낮추는 극단적 생리 조절 능력은 심부전 환자 치료 연구에 영감을 줬다. 고래 심장 단백질 분석을 토대로 개발된 약물은 현재 임상 3상 단계에 있다. 150kg이 넘는 고래의 심장이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는 길을 연 셈이다.
책은 ‘땅·하늘·바다·땅속’ 네 가지 생태 환경을 축으로 총 4부 16장으로 구성된다.
1부 ‘땅’에서는 캥거루의 번식 구조와 개미 군집의 협력적 면역 체계가 백신 설계에 미친 영향을 다룬다.
2부 ‘하늘’에서는 철새의 이동 경로 최적화 원리가 응급 구조 헬기 연료 효율 개선으로 이어진 사례, 맹금류의 눈 구조가 망막 질환 진단 기술 발전에 기여한 과정을 분석한다.
3부 ‘바다’에서는 고래의 심박 조절 전략과 산호초의 공생 시스템이 각각 심장 재활 프로그램과 인공 장기 배양 기술에 응용된 사례를 소개한다.
4부 ‘땅속’에서는 지하 미생물의 항생제 생성 능력과 흰개미 둔덕의 통풍 구조가 신약 개발과 에너지 절약형 건축 설계로 확장된 과정을 추적한다.
모건 박사는 동시에 불편한 질문도 던진다. 돼지 심장을 인간에게 이식하는 크세노이식 기술은 의학적 진전을 이뤘지만, 동물 복지와 생명 윤리 논쟁을 촉발했다. 그는 동물을 단순한 실험 도구가 아닌 ‘공존의 파트너’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남극 펭귄의 동결 방지 단백질은 저체온증 치료제로, 바퀴벌레 신경계 연구는 마비 환자 재활 로봇 설계에 활용되고 있다. 단세포 박테리아부터 거대한 고래까지, 모든 생명은 인간 의학의 스승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결국 이 책은 과학 교양서이면서 동시에 윤리적 선언문이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한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해답을 빌려 생존해 온 존재임을 일깨운다. 캥거루의 자궁, 개구리의 피부, 고래의 심장이 말없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생명을 구하는 열쇠는 언제나 자연 속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뉴스컬처 최병일 newsculture@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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