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이면 상 위는 늘 풍성하다. 떡국에 전, 잡채와 갈비찜까지 빠짐없이 차려지지만 정작 손이 자주 가는 음식은 의외로 단순한 것일 때가 많다. 기름진 음식이 이어지다 보면 칼칼하고 산뜻한 맛이 간절해진다.
그럴 때 냉장고 한쪽에서 묵묵히 익어가던 묵은지가 제 몫을 한다. 묵은지전을 부쳐 상 위에 올리면, 명절 분위기 속에서도 색다른 활기를 더할 수 있다.
유튜브 '아원밥상 Home cooking'
묵은지는 시간이 만들어낸 맛이다. 갓 담근 김치의 아삭하고 풋풋한 맛과 달리, 묵은지는 깊은 산미와 농축된 감칠맛을 품는다. 발효가 충분히 진행되면서 배추의 단맛이 살아나고, 양념은 부드럽게 어우러진다. 이 묵은지를 잘게 썰어 전으로 부치면 기름과 만나면서 신맛은 한층 둥글어지고, 감칠맛은 더 또렷해진다. 특별한 재료가 없어도 묵은지 하나로 충분히 존재감 있는 한 접시가 완성된다.
묵은지전을 맛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묵은지 손질이 중요하다. 너무 시다면 찬물에 가볍게 헹궈 신맛을 조절하고, 물기를 꼭 짠다. 이때 물기를 충분히 제거하지 않으면 반죽이 질어져 전이 바삭하게 부쳐지지 않는다. 묵은지는 송송 잘게 썰어야 반죽과 고루 섞이고 식감도 부드럽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생성 이미지
반죽은 단출할수록 좋다. 밀가루와 부침가루를 7대3 정도로 섞고, 찬물을 부어 되직하게 푼다. 여기에 다진 묵은지를 넣고 고루 섞는다. 기호에 따라 다진 돼지고기나 참치, 혹은 오징어를 조금 더하면 풍미가 깊어진다. 하지만 기본은 묵은지 자체의 맛이다. 양파나 대파를 약간 넣어 단맛과 향을 더해도 좋다. 소금은 거의 넣지 않아도 된다. 묵은지의 간이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
팬을 충분히 달군 뒤 식용유를 넉넉히 두른다. 기름이 적으면 전이 눅눅해지기 쉽다. 반죽을 국자로 떠 올려 얇게 펴주는데, 두껍게 부치기보다는 가장자리가 살짝 비칠 정도로 얇게 펴야 바삭함이 살아난다. 중불에서 천천히 익히다가 가장자리가 노릇해지면 뒤집는다. 뒤집은 뒤에는 팬 가장자리에 기름을 조금 더 둘러 바삭함을 더한다. 완성된 묵은지전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야 제맛이다.
유튜브 '아원밥상 Home cooking'
묵은지전의 매력은 식감 대비에 있다. 첫입에 느껴지는 바삭함 뒤로 묵은지의 부드러운 결이 이어지고, 씹을수록 산뜻한 산미와 고소한 기름 향이 어우러진다. 기름진 명절 음식 사이에서 입안을 정리해주는 역할을 한다. 따뜻할 때는 물론, 한 김 식어도 맛이 크게 떨어지지 않아 상 위에 오래 두고 나눠 먹기 좋다.
또 하나의 장점은 술안주로도 손색이 없다는 점이다. 막걸리와는 특히 궁합이 좋다. 묵은지의 새콤함이 막걸리의 달큰함과 만나 균형을 이룬다. 소주와 곁들여도 느끼함을 잡아주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어른들은 술안주로, 아이들은 간식처럼 함께 나눌 수 있는 메뉴다.
유튜브 '아원밥상 Home cooking'
명절이라고 해서 반드시 정해진 음식만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냉장고 속 재료를 활용해 새로운 메뉴를 더하면 상차림이 한결 자유로워진다. 묵은지전은 준비도 간단하고 재료도 소박하지만, 맛은 결코 가볍지 않다. 남은 명절 음식이 지겨워질 즈음, 묵은지전 한 장을 부쳐보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와 함께 퍼지는 고소한 향은 부엌을 금세 따뜻하게 만든다.
결국 명절 음식의 의미는 함께 나누는 데 있다. 화려한 요리도 좋지만, 모두가 둘러앉아 젓가락을 함께 올리는 소박한 전 한 장이 더 기억에 남을 때도 있다. 묵은지전은 바로 그런 음식이다.
Copyright ⓒ 위키트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