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그만두고 찍은 영화로 베를린영화제 진출한 오지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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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그만두고 찍은 영화로 베를린영화제 진출한 오지인 감독

엘르 2026-02-16 07:31:57 신고

오지인 집단이 만들어내는 믿음과 그 안에 편승하려는 개인의 심리를 블랙 코미디로 포착해 온 감독이다. 컬럼비아 대학교 MFA 과정 중 연출한 단편영화 〈쎄이 썸띵〉으로 국내외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눈길을 끌었다. 졸업 작품 〈쓰삐디!〉는 할리우드 제작사인 인디언 페인트브러시 프로덕션의 지원을 받았으며,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K플러스' 단편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코트와 수트 세트업, 셔츠와 레더 벨트는 모두 Lemaire. 이어링은 Cos.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코트와 수트 세트업, 셔츠와 레더 벨트는 모두 Lemaire. 이어링은 Cos.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쓰삐디!〉가 곧 개최될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섹션에 공식 초청됐어요. 어떤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인가요
1989년을 배경으로 속독 학원에 다니는 아홉 살 아이 ‘정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예요. 아이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으로 들어가면서 겪게 되는 상황을 블랙코미디 톤으로 다뤘어요. 겉만 보면 웃긴 장면이 많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묘하게 불편한 감정이 남는 영화예요. 그런 불편함이 이 영화의 정서라고 생각해요.


제너레이션 섹션은 아동과 청소년의 삶을 다루는 부문이잖아요. 이 섹션에 초청됐다는 점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이 작품은 아이들이 주인공이지만, 아이만을 위한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이의 시선을 통해 어른이 만든 시스템을 보여 주고 싶었고, 그 시선이 제너레이션 섹션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아이의 눈으로 보면 너무 당연한 것들이 갑자기 이상해지는 순간이 있잖아요.


베를린은 감독 본인의 작품이 처음 국제무대에 소개되는 자리이기도 해요. ‘첫 국제영화제’라는 사실이 개인적으로 크게 와닿나요
‘처음’이라는 개념에 큰 의미를 두는 편은 아니에요. 처음 가보는 곳, 처음 먹어보는 음식 같은 것들이 저에게 특별하게 각인되지 않거든요. 그런데 질문지를 받고 생각해보니 그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에게 이게 ‘처음’일 때 의미가 생기는 것 같더라고요. 제 작품이 국제무대에 처음 소개되는 자리라면 저보다 관객에게 ‘오지인 감독과의 첫 만남’이라는 의미가 더 클 것 같아요. 저는 그 한 점 뒤에서 있는 느낌이고요.


영화를 보면 웃다가 멈칫하는 순간이 있어요. 정민이 달리기를 할 때 화면이 분할되거나 속독 학원에서 선생님이 소근육 마사지를 가르치는 장면 같은 순간이요. 이런 감각이 국제적으로 통했다고 느끼나요
아직 베를린에 가본 건 아니라서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굉장히 한국적인 소재임에도 다른 문화권에서 영화적 구조나 감정이 잘 전달된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제너레이션 섹션 프로그래머에게 편지를 받았는데, 문어적 감각이나 편집 스타일, 시각적 요소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어요. 그런 부분이 흥미롭게 받아들여진 것 같아요.


작품의 출발점이 된 감정이나 단어가 있다면
‘아이러니’라는 단어예요. 학교에서 코미디라는 장르는 아이러니에서 출발한다고 배웠거든요. 저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몰두하는 대상에 늘 관심이 있어요. 교회의 방언이나 음모론 같은 것들이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사람들이 엄청난 에너지를 쏟는 모습이 늘 흥미로웠어요.


미장센이 드러나는 ‘정민이용원’. 오지인 감독은 1989년 서울의 알록달록하고 촌스러운 무드를 자아내기 위해 정민 아버지의 이용원을 세밀하게 설계했다.

미장센이 드러나는 ‘정민이용원’. 오지인 감독은 1989년 서울의 알록달록하고 촌스러운 무드를 자아내기 위해 정민 아버지의 이용원을 세밀하게 설계했다.


전작 단편영화 〈쎄이 썸띵〉이 교회 방언을 다뤘다면, 〈쓰삐디!〉에서는 ‘속독’이라는 소재를 선택했어요. 어떻게 발견한 소재였나요
비슷한 에너지를 가진 소재를 찾다가 유튜브에서 예전에 방송된 MBC 〈그 때 그 시절〉 같은 영상을 보게 됐어요. 속독·속기·주산 산수학원 같은 콘텐츠였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보면서 ‘아, 이거다’ 싶었죠.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을 설득했던 그 분위기가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실제 경험에서 출발한 이야기인가요
그렇진 않아요. 저는 1989년생인데, 영화 배경도 1989년이에요. 속독 학원에 다녀본 적도 없어요(웃음). 오히려 경험이 없기 때문에 더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다만 커리어만 놓고 보면 저는 시스템을 잘 따른 사람이에요. 시험을 보고 들어가는 고등학교를 나왔고, 대기업에서도 일했고요.


그렇게 ‘시스템을 잘 따른 경험’이 영화에도 반영된 것 같아요
한국 사회,특히 교육 시스템은 줄 세우기 구조가 강하잖아요.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그 안에서 더 많은 불합리함을 자연스럽게 학습했고요. ‘내가 맞춰야지’ ‘내가 참아야지’ 같은 감각을 어릴 때부터 배웠죠. 그런 경험이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 같아요.


이야기의 중심에 아이를 둔 선택이 좀 더 설득력 있게 느껴져요
단편영화라는 형식에서는 아이의 시선이 훨씬 즉각적으로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복잡한 설명 없이도 관객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존재고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했는데, 수업에서도 단편영화 주인공으로 아이를 선택하는 이유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작품 속 정민을 어떤 아이로 상상했나요
주관이 뚜렷하고 외향적인 아이요. 아빠를 좋아하고요. 겉으로는 씩씩해 보이지만, 그 안에 여러 감정이 겹쳐 있죠.


브레이슬릿은 Cos. 셔츠와 이어링은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브레이슬릿은 Cos. 셔츠와 이어링은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그런 정민이 결국 시스템에 순응하는 선택을 합니다. 이 결말에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각본 피드백을 받을 때 해피 엔딩으로 끝내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세상이 아이들에게 그렇게 녹록지 않다고 생각했고, 특히 여자아이인 만큼 더더욱 그 과정을 구태여 포장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게 곧 영화 밖 현실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드라마 〈 백번의 추억〉의 김규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임승민 등 아역배우들이 출연해 화제를 모았죠. 배우를 선정하는 기준이 있다면
아역배우만큼이나 부모님의 태도가 중요했어요. 아이를 모델처럼 ‘예쁘게 보이게’ 하는 게 아니라, 한 명의 배우이자 협업자로 존중해야 했거든요. 제 영화 속 주인공은 늘 특이한 행동을 하고, 예쁘기만 한 캐릭터는 아니거든요.


현장에서 아역배우를 디렉팅할 때 특별히 신경 쓴 부분도 있었나요
정민이가 교탁 앞에서 우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제가 옆에 앉아 손잡고 호흡을 같이 했어요. 혼자 많은 사람 앞에서 연기해야 하는 상황인 만큼 감독으로서 최대 한 곁에 있어주고 싶었어요. 또 규나 배우가 내성적이라 촬영 전에 같이 목청을 지르면서 몸을 풀기도 했고요.


내성적 성향은 아역배우에게 오히려 장점이 되기도 할까요
그럼요. 외향적인 아이들은 주변을 많이 의식해요. 그런데 규나 배우는 자기 또래 배우들이 있어도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하더라고요. 집중력이 대단했어요. 아역이지만 배우로서 굉장한 재능이라고 느꼈어요.


연출적으로 영향을 받은 감독이나 작품이 있는지
음,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연출에서 가장 중요한 게 결국 내 ‘개성’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작품도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어요.


평소 창작자로서 영향받은 인물을 꼽자면
영국의 여성 작가 버지니아 울프요. 한 편의 명작을 남기는 것보다 조금 모자라도 계속해서 자기 이야기를 해나가는 태도를 배우고 싶어요. 완성도나 결과에 매달리기보다 쓰는 행위 자체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 인상 깊었어요. 그런 집념과 신념이 창작자에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대표 장면인 속독 훈련 신. 속독 학원에서 선생님의 수업에 따라 소근육 마사지를 이어가며 꿈꾼다. 퍼포먼스에 몰두하는, 해야만 하는 우리를 떠올리게 한다.

대표 장면인 속독 훈련 신. 속독 학원에서 선생님의 수업에 따라 소근육 마사지를 이어가며 꿈꾼다. 퍼포먼스에 몰두하는, 해야만 하는 우리를 떠올리게 한다.


베를린국제영화제에 가면 꼭 보고 싶은 작품이나 직접 만나보고 싶은 감독이 있나요
지난해 5월 칸에 다녀온 적 있는데, 작품 초청으로 간 건 아니었지만 그런 경험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베를린도 많이 기대하고 있어요. 유명한 감독보다 저처럼 제너레이션 섹션에서 경쟁작으로 올라온 작품들이 궁금해요. 아동이나 청소년의 이야기를 각 나라의 감독들이 어떤 방식으로 풀어냈는지 직접 보고 싶어요.


같은 섹션에 있는 작품을 보는 게 오히려 더 자극이 되겠네요
맞아요. ‘저런 이야기도 가능하구나’ 하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감각을 현장에서 직접 느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관객이 이 장면만은 오래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은요
단연 몽타주 신이에요. 중반부에 정민이가 속도 훈련을 하면서 굉장히 노력하는 과정이 몽타주 시퀀스로 나오는데, 그 장면을 재미있게 찍으려고 스태프끼리 많이 고민했어요. 저도 그렇고, 배우와 스태프 모두 현장에서 즐겁게 촬영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작품 밖의 이야기도 해볼게요. 외고를 나와 대기업에 근무하다가 영화를 선택했어요. 회사를 그만둔 계기가 궁금해요
처음부터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에요. 그런데 ‘이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비교적 빨리 들었어요. 대기업에는 존경할 만한 임원이 많지만, 막상 그 자리에 있는 제 모습은 잘 상상이 안 됐거든요.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일을 오랫동안 해야겠다고 다짐했죠.


그 중요한 일이라는 게 결국 영화였나요
사실 영화 그 자체는 아니었어요. 원래 글을 읽고 쓰는 걸 좋아했거든요. 이야기를 만들고 전하는 ‘스토리텔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형식은 소설이든 웹툰이든 상관없었어요. 다만 영화는 가장 많은 사람이 봐주는 매체라고 생각 했고, 그래서 선택했어요.


전혀 다른 영역에서 출발한 만큼 막막함도 컸을 것 같아요
맞아요. 영화전공도 아니었고, 경험도 없었으니까요. 일단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다행히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하면서 기본기를 배울 수 있었고요.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영화를 배우러 떠났잖아요. 경제적 부담은 크지 않았나요
미국에서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았고, 학교 장학금도 있었어요. 그 전까지 대기업에서 모아둔 돈도 있었고요. 현지에서는 스쿨 잡도 계속했어요. 학비 부담은 없었지만 생활비는 정말 만만치 않았어요. 커피 한 잔도 너무 비싸더라고요(웃음).


가족의 반응은 어땠나요
처음엔 좀 황당해했어요. 특히 아빠는 제가 대기업을 그만둔다고 해서 충격이 컸나 봐요. 그래도 ‘하고 싶은 거 하는구나’ 정도로 받아들여 주셨어요. 저희 집 분위기가 그래요. 누가 뭘 하겠다면 ‘아, 하나 보다’ 하고 넘어가는 편이에요.



친동생이 그룹 ‘긱스’ 출신 래퍼 릴보이라고 들었어요. 릴보이 역시 음악이라는 불확실한 길을 먼저 선택했잖아요
맞아요. 동생이 유명하지 않았을 때 홍대 언더그라운드 무대에서 공연하면 제가 가서 보고 그랬어요. 길거리 공연도 보고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이 참 신기해요. 서로 말은 하지 않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응원하고 있어요.


서로의 작업에 대해 조언하거나 의견을 나누기도 하나요
그런 편은 아니에요. 여느 남매처럼 그냥 각자의 리듬으로 가는 편이에요. 대신 중요한 순간은 알고 있고, 서로 축하할 일은 해주는 정도죠.


최근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가 있다면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One Battle After Another〉(2025)요. 너무 좋아서 그 영화에 대한 글도 블로그에 길게 썼어요. 각본과 연출 모두 완벽에 가깝다고 느꼈어요.


어떤 점에서 그렇게 강하게 기억에 남았나요
이야기를 끌고 가는 방식이 정말 치밀해요. 구조적으로도 그렇고, 인물들이 놓이는 상황이나 리듬이 굉장히 정확하거든요.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으면서 끝까지 관객을 붙잡고 가는 몰입력도 대단했어요.


교회 방언을 다룬 〈쎄이 썸띵〉부터 〈쓰삐디!〉까지 연이어 블랙 코미디 단편을 선보이고 있어요. 이 장르에 계속 마음이 가는 이유가 궁금해요
앞서 말한 ‘아이러니’라는 키워드가 여전히 크게 와닿는 것 같아요. 웃기지만 그 웃음이 완전히 가볍지만은 않은 이야기를 좋아해요. 그런 톤의 영화를 계속 만들어보고 싶어요.


멜로, 드라마처럼 몽글몽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심은 없나요
이상하게 그런 쪽에는 마음이 잘 안 가요(웃음). 늘 조금 더 비틀고 뒤틀린 소재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다음 작품도 그런 결을 이어갈까요
아마도요. 지금은 ‘지구 평면설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블랙 코미디를 쓰고 있어요. 이번에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들의 이야기고요. 어쩌면 〈쓰삐디!〉보다 조금 더 날 선 느낌일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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