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훈 더봄] 한양도성에 새겨진 석공 안이토리(安二土里) 이름은 왜 4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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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훈 더봄] 한양도성에 새겨진 석공 안이토리(安二土里) 이름은 왜 4자일까?

여성경제신문 2026-02-15 13:00:00 신고

한양도성 8개 문 가운데 광희문. 도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이 문으로 내보냈다 하여 속칭 '시구문(屍口門)'으로 불렸다. / 이진훈 사진
한양도성 8개 문 가운데 광희문. 도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이 문으로 내보냈다 하여 속칭 '시구문(屍口門)'으로 불렸다. / 이진훈 사진

모내기철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금위영(禁衛營) 군사들의 날 선 재촉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모내기가 시작되기 전 수구문(水口門) 개축 공사를 마쳐야 일꾼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국시로 내세운 나라에서 농사철을 놓치는 것은 크나큰 범죄 행위요, 민심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처음 도성을 쌓을 때도 농사철을 피해서 팔도 일꾼들을 불러 모은 것이었다.

“야, 이놈들아! 빨리빨리 서둘러야 할 것 아냐? 이달 보름까지는 하늘이 두 쪽 나는 수가 있어도 수구문(水口門) 개축 공사를 마치고 일꾼들을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짓게 하라는 것이 어명이시다, 어명!”

“감관 나으리! 누가 그걸 모릅니까? 우리도 죽을 지경입니다. 하루빨리 고향에 가서 부모님도 뵙고, 토끼 같은 새끼들도 보고,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로 사내 품 그리워하는 마누라도 달래줄 것 아니것소?”

“안 편수! 그러니까 석수장이들을 몰아치라니까. 고향이 그렇게 그리우면 오늘부터는 횃불 켜고 밤샘 작업을 하자구. 날짜를 못 맞추면 우리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구. 자네만 고향에 못 가는 것이 아니구 엎어지면 코 닿을 도성 안에 집을 놔두고도 벌써 한 달 가까이 나두 못 가구 있네. 마누라가 도망을 갔는지 딴 서방을 꿰찼는지도 모를 지경이네.”

“감관 나으리, 나는요 재작년 겨울에 붕괴된 남산 성벽 쌓는 데 끌려 나가 고생 고생한 것이 엊그제입니다. 이제 다시 이 시구문(屍口門) 수축 공사에 끌려왔으니 이놈 몸뚱어리 팔자가 원망스럽습니다.”

“어쩌겠나? 나라님이 시키는 것을. 자네나 나나 그저 하라면 하는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을. 그나저나 자꾸 시구문 시구문 하지 말게나. 광희문(光熙門)일세. 광희문이라는 말이 안 나오면 수구문이라 하라구. 일꾼마다 자꾸 시구문 시구문 하니까 언제 어디에서 시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으스스하다구.”
 
감관(監官)이라고 수구문 밖 무당골 사람들이 시구문이라 부르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일꾼들도 일꾼들이지만 감관도 자신을 이 수구문 개축 공사에 파견한 도제조 영감에게 불만이 가득 쌓인 처지였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나라 눈치를 보느라 임진년과 병자년에 일어난 두 난리통에 무너진 성곽이며 궁궐을 개축하지 못하고 방치하다가 금상(今上, 숙종)이 즉위한 뒤 청나라의 간섭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한양도성이며 북한산성을 수축하는 일에 국력을 모았다.

공사를 벌이는 곳이 도성 안팎 수십 군데인데 하필 자신을 시구문 개축 공사 책임 감관으로 보낸 것이 못내 께름칙했다. 도성 팔문(八門) 가운데 도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내보내는 문은 수구문과 소의문(서소문) 두 군데뿐이다. 그래서 두 문 바깥 동네 산자락에는 온통 공동묘지뿐인 것이다. 그중에서도 수구문은 나가는 시체 수가 더욱 많았다.

개축 공사를 하는 기간에도 도성 안 사람들은 끊임없이 죽어서 사흘이 멀다고 상여가 문밖으로 나가고, 거적에 둘둘 만 시체를 야밤을 틈타 몰래 내보내려다 순라군(巡邏軍)에게 붙들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도성 안에서 역병(疫病)이라도 돌면 수구문 밖 무당골 개천에서는 내다 버린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골목 무당집마다 넋걷이 굿으로 날밤을 새우는 날이 허다하니 마을 사람들 모두 시구문이라 부르는 것은 당연했다.

이렇다 보니 감관이나 석수장이, 일꾼들의 꿈자리가 밤마다 뒤숭숭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감관은 이런 꿈자리에서 시달리는 것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라도 공사 기간을 단축하려고 일꾼들을 몰아치는 것이었다.

“감군 나으리, 허구한 날 돌을 쪼아대고 집채만 한 돌을 갈아대는 통에 석수장이들 모두 가는귀가 먹었어요. 게다가 사나흘 들이로 시체가 수구문 밖으로 나가고, 그것 썩는 냄새를 반찬 삼아 밥을 먹으니 꿈자리가 여간 뒤숭숭한 게 아니랍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횃불 켜고 밤샘 공사까지 계속하라시면 언제 어디에서 사고가 터져 우리마저 무당골 개천에 버려지는 신세가 될지 모릅니다. 귀동냥해 보니 북한산성에서 석재 나르다가 대동거(大童車)에 깔려 죽은 석공과 승군(僧軍)들이 많다고 합디다.”

“안 편수, 자네 말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네만 그러나 어쩌겠나? 자네나 나나 매여 있는 신세이니. 아무튼 육축(陸築) 공사가 거의 끝나 가니 서둘러 홍예(虹蜺) 공사를 위해 돌 다듬는 일을 서둘러 주게. 금상의 증조이신 인조 대왕께서 치욕스럽게도 이괄의 난과 병자년 오랑캐들의 난리 때 도성을 버리고 이 문으로 두 번이나 도망가지 않으셨나? 그래 그런지 금상께서 그 치욕을 씻고자 이 수구문을 더 튼튼하게 수축하라 엄명하셨다는군.”

“튼튼하게 지어 놓으면 뭐 합니까? 임진년 왜구들의 난리 때나 병자년 오랑캐 침략 때도 백성들은 도성 안에 내버려두고 먼저 성 밖으로 줄행랑을 친 분들이 뉘신데요? 죽어 넘어가는 백성들이 나라님 눈에 뵈기나 했겠습니까?”

“아 이 사람아, 입조심해. 그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갈지 모르네.”

“언제 성돌에 깔려 죽을지 모르는 몸뚱어리인데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이 개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산도적이 되겠다고 도망친 일꾼들이 몇 명입니까? 저라고 어찌 도적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아니 했겠습니까? 처자식 생각, 똥파리 십장만도 못한 편수라는 알량한 책임감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안 편수, 자네 주둥이 함부로 놀리다가 국법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네. 말조심하라구.”

“감관 나으리, 내가 죽임을 당하면 남은 석수와 일꾼들 데리고 수구문 개축 공사를 기한 내에 마칠 수나 있을 것 같습니까? 당장 그날 밤으로 모두 줄행랑을 놓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언쟁에 일찌감치 일손을 놓고 귀를 세운 석수들이 국법에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감관의 말에 분노한 얼굴로 안 편수 주위로 몰려들었다. 물색을 알아차린 금위영 군사들도 재빨리 감관 주위로 하나둘 달려왔다. 진퇴양난의 상황을 만난 감관의 낯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당장이라도 안 편수를 포박해 금위영으로 끌고 가고 싶었지만 코앞에 닥친 완공 시한 때문에 무작정 몰아칠 계제만도 아니었다.

“안 편수, 그래도 이 사람아, 도적보다는 편수 자리가 낫지 않겠나? 가족을 생각해야지?”

“왜 안 그렇겠습니까? 가족이 고향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도적이 될 수도 없고. 에이 빌어먹을! 어서 빨리 이 지긋지긋한 공사를 끝내고 살아서 고향에 가는 것이 유일한 꿈입니다. 작년 봄 목멱산 자락 성곽 수축 공사를 끝내고 나니까 그곳 감관 나으리께서 성벽 돌에 내 이름을 새겨 주신다 하더군요. 이 무지렁이 석수쟁이 이름은 새겨 뭣하냐고, 고향 가는 여비나 두둑이 달랐더니 뭐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겨야 한대나 뭐래나. 누가 모를까 봐 그런 사탕발림을 하더라고요. 아 그거 성벽이 다시 무너지면 그 책임을 물어 치도곤 먹이려는 것 아닙니까?”

“그래 잘 생각했네. 근데 자네 이름이 목멱산 도성에 새겨졌단 말이지?”

“저것이 네 이름이다 보여주길래 내 이름인가 보다 했지 까막눈이 언문(諺文)인지 진문(眞文)인지 알기나 하나요? 그렇대니까 그런가 부다 했지요. 근데 이상한 것은 분명 우리 아버님께서 내 이름을 둘째 아들이라 ‘안, 이, 돌’ 세 글자로 지어 주셨는데 성곽 돌에는 ‘변수(邊首) 안, 이, 토, 리(安二土里)’ 네 글자로 새겨져 있다고 누가 일러주데요. 뭔 영문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목멱산(남산) 국립극장 근처 한양도성에 '변수 안이토리(辺首 安二土里)'라는 석수장이 이름을 새긴 각자성석(刻字城石)이 있다. /사진=이진훈
목멱산(남산) 국립극장 근처 한양도성에 '변수 안이토리(辺首 安二土里)'라는 석수장이 이름을 새긴 각자성석(刻字城石)이 있다. /사진=이진훈

“이 사람아, 석수장이의 우두머리인 자네를 ‘편수’라 하지 않나? 그것을 진문으로 적어 ‘변수’라 새긴 것이고, ‘안이돌’의 ‘돌’은 진문에는 마땅한 글자가 없으니까 ‘토리(土里)’라 풀어 적은 것이라네. 왜 아낙네들 이름 중에 원치 않던 웬 딸년이 또 태어났다고 ‘언년’이라 부르는 이름이 많잖은가. 그것을 진문으로 적은 것이 ‘어인년(於仁年)’일세.”

“언년이는 우리 고향에만도 서너 명은 됩지요. 제 나라 글자도 어엿이 있다는데 되놈들 글자로 적다니, 거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요.”

“안 편수, 이 수구문 공사가 끝나도 자네 이름을 성돌에 새겨주겠네. 혹시 알겠는가? 먼 훗날 자네 후손 중에 진문을 깨우친 자손이 있으면 알아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부질없습니다. 먼 훗날 자손이 지 할애비 이름 넉 자를 알아보는 것보다 당장 고향에 있는 처자식들 배나 곯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몸뚱어리 하나로 사는 팔자,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젤로 큰 소망입니다.”

“그래야지! 자네들이나 나나 똑같은 소망일세. 저 홍예돌 다 쌓고 마지막으로 쐐기돌만 올려 끼워 넣으면 나머지 일이야 식은 죽 먹기지. 쐐기돌만 무사히 올리면 내가 소는 못 잡아도 돼지 한 마리 잡아 잔치 한번 열어줌세.”

“기왕 잡는 것 100근 넘는 돼지는 잡으셔야 모처럼 고기 먹느라 밤샘 한번 해 보지 않겠습니까?”

석수장이들은 돼지꿈을 꾸어가며 사흘 밤낮을 쪼고 다듬어서 수구문 안팎에 쌓을 홍예석 스물네 개와 쐐기돌 두 개를 완성했다. 감관은 석수장이들을 독려하기 위해 100근도 훨씬 넘는 암퇘지를 구해다 공사장 한편에 묶어두었다.

수구문 개축 공사에 동원된 일꾼들과 금위영 군사들이 모두 모여 홍예문의 쐐기돌을 올려 박는 날이 왔다. 쐐기돌 하나 무게가 천 근도 넘어 보이니 도르래 지지대가 제대로 버텨줄지 걱정이 앞섰다. 돼지는 벌써 가마솥에서 설설 끓고 있었다.

수구문 바깥쪽의 쐐기돌을 무사히 올려 박은 뒤 일꾼들은 곯은 배를 움켜쥔 채 도르래를 문 안쪽으로 옮겨가면서도 눈은 연신 튼실한 암퇘지를 삶는 가마솥 쪽으로 돌렸다. 먹고 하자는 일꾼들과, 끝내고 먹자는 일꾼들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일었지만 감관은 어디 고기만 먹을 수 있냐, 기왕 먹는 것 일 끝내고 술도 배지껏 먹자고 부추겼다. 편수 안이돌도 감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일을 마무리하고 새벽 먼동이 틀 때까지 퍼질러 앉아 먹는 것이 열 배 백배 나을 것이라 되새겼다.
 
안 편수가 일꾼들을 다독이며 쐐기돌을 도르래로 끌어 올리는 순간 지지대가 한쪽으로 기우뚱하더니 쐐기돌이 하필 안이돌의 몸을 덮쳤다. 순식간이었다. 누구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안이돌의 단말마가 무당골 산골짜기를 울렸다.

안이돌이 뜨끈한 돼지 국물은커녕 고향 땅도 밟지 못한 채 허망하게 죽어간 뒤 역사는 이 사실을 이렇게 간략하게 기록했다.

禁衛營啓 曰, 今此水口門改築時, 虹霓石安排之際, 本營石手安二土里, 爲 石所壓, 以致重傷, 多般救療, 終至殞命, 事極驚慘。自本營, 題給若干米布, 使之斂葬之意, 敢啓。
答曰, 知道。令該曹恤典擧行。

(금위영에서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이번 수구문 개축할 때 홍예석을 배치하던 중에 금위영 소속 석수장이 안이토리가 돌에 깔려 중상에 이르렀습니다. 여러 방편으로 치료하였으나 끝내 운명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참담한 일입니다. 금위영에서는 약간의 쌀과 옷감을 지급하여 염을 하여 장례를 치르게 하였으면 해서 감히 장계를 올립니다.”

임금이 답을 내렸다. “알겠으니 그리하도록 하라.” 임금은 해조(=호조)에 명하여 구휼하도록 하였다.)
- 승정원일기 숙종 37년(1711년) 4월 8일

여성경제신문 이진훈 한국미니픽션작가회 회원·전 영동고 교사 
mokleeyd@nate.com


☞미니픽션=아주 짧은 분량 속에 완결된 서사를 담아낸 초소형 소설을 말한다. '한 뼘 소설', '손바닥 소설(掌篇小說)', '플래시 픽션(Flash Fiction)' 등으로도 불리며 주로 설명은 생략하고 상징이나 묘사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끝맺는다. 짧은 틀 안에 소설적 재미와 철학을 압축해 놓은 '문학의 에스프레소'라고 할 수 있다. 

이진훈 작가·교육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EBS와 고등학교에서 오랜 시간 국어와 논술을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했다. 한국미니픽션작가회 회원으로 <베이비 부머의 반타작 인생> 을 펴냈으며, 구상선생기념사업회 이사, (사)K문화독립군 부회장 등 다양한 문화 단체에서 중책을 맡고 있다. 한양도성의 역사와 철학을 담은 저술 활동을 전개하면서 <한양도성 文史哲  순성놀이> 를 발간했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전례위원 경험을 바탕으로 <명절 차례와 기제사> 를 발간하는 등 전통문화 계승에도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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